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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영(金貴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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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현경(顯卿)
호(號)동원(東園)
생년1520(중종 15)
졸년1593(선조 26)
시대조선전기
본관상산(商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응무(金應武)
조부김사원(金士元)
공신호평난공신(平難功臣)

[상세내용]

김귀영(金貴榮)
1520년(중종 15)∼1593년(선조 2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조부는 목사 김사원(金士元)이며, 부친은 김응무(金應武)이다.

154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2년 뒤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곧 홍문관으로 옮겨 정자저작을 역임하고 성균관박사로 전직되었다.

이어 부수찬정언수찬을 거쳐 1555년 김홍도(金弘度)유순선(柳順善) 등과 사가독서했으며, 그해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종사관이 되어 광주(光州)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헌부집의로 재임중,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예관(禮官)으로 활약한 바 있다.

1558년 홍문관전한에 올랐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로 옮겼으며, 이때 경연에서 경기내의 농민생활안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의로 전직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으로 다시 우부승지로 체직되었다.

그뒤 한성부우윤춘천부사를 지냈고, 대사간대사헌부제학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군주의 공명정대한 처신과 윤원형(尹元衡) 첩자(妾子)의 허통(許通)문제 등에 관해 활발한 언론을 하였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589년에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녹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으며,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과 뒤이어 피난온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고,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국(推鞫)하여 회천으로 유배되어 가던 중 중도에서 죽었다. 숙종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명 : "귀영(貴榮)"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0矣○領議政朴淳將敀掃墳上曰豈可使右相獨在朝乎其速卜相淳與金貴榮僉卜而以鄭芝衍李珥及鄭惟吉三人欲卜入而貴榮固執以爲惟吉新被重䮕不可卜蓋其意欲卜朴大立李文馨相爭良久不決淳曰大立文馨不可卜乃以朴素立鄭芝衍二人卜
紀年便攷v13邪是非問諸大臣而左相金貴榮憚於甲乙乃敢為依阿苟容之態曾見古今大臣有如此者乎都承旨朴謹元䓁覆逆又下嚴旨貴榮辭遞嘗爲校理時上疏請雪乙巳諸人寃極。論尹元衡罪惡策平難㓛二䓁封上 洛府院君壬辰陷倭削官謫熙川甲午卒于
紀年便攷v13南床翰林選湖堂歴銓郞舎人典翰宣祖朝典文衡辛巳入相至左入耆社 上招三公問李珥為人朴淳曰憂國忘身赤心靡他貴榮曰人有內邪而外善外和而內惡者今珥之心術未能的知不可輕以小人目之亦不敢以君子譽之傳子政院曰子以不知忠邪
紀年便攷v15風度氣像遠超凡類余未獲相接書此以贈爲神交三十一以通政典文衡先是薦文衡時德馨獨少一圈滿座愕然曰此何也金貴榮笑曰老夫所為徐曰年少位早稱待才老德熟如何德馨聞之欣然士論両美之壬辰以單騎赴倭賊責以大義請兵於 上國
國朝人物志v2上曰左相金貴榮憚於甲乙是非欲爲依阿苟容之態自古大臣有如此者乎解相家居久之趙憲上疏斥貴榮遂辭歸商山壬辰倭亂分遣諸王子臨海君珒往關北貴榮從之順和君往關東黃廷彧從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