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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효삼(白效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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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수원(水原)
활동분야문신
백회(白繪)

[상세내용]

백효삼(白效參)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증조부는 백연(白璉)이고, 조부는 백인경(白仁景)이며, 부친은 백회(白繪)이다.

1419년(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417년(태종 17) 친시에 을과 2등 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부사직(副司直)‧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진응사(進鷹使) 정발(鄭發)‧통사(通事) 강상부(姜尙傅)와 함께 명나라 연경(燕京)에 진응사로 다녀왔다. 당시 정발은 우리나라의 화자(火者: 환관)들에게 한어(漢語)를 가르쳤는데, 그때 정발에게 한어를 배웠던 정선(鄭善)이란 자가 명나라 조정에서 환관으로 있었다. 환관 정선은 진응사로 온 정발을 보고 사부(師傅)라 칭하며 예를 갖추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등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런 사실을 돌아와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진응사를 수행했던 장현(張賢)이란 자가 문제 삼고 보고하였는데, 이에 사신 일행이 불계지죄(不啓之罪: 보고하지 않은 죄)로 다스려졌다. 서장관의 역할이 관리들을 검찰(檢察)하는 소임도 있는데, 중국 조정에 들어간 환관과의 사적인 대화를 방관하고, 맡은 책무를 소홀히 한 죄로 곤장 60대에 해당하는 속전(贖錢)을 바쳤다. 1435년(세종 17)에는 세종이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한 찬집관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때 부사직으로 참여해서 시를 지었다. 1442년(세종 24)에는 사헌부지평으로 재직하였는데, 대사헌 정갑손(鄭甲孫)‧집의(執義) 이사철(李思哲)‧장령 이겸지(李謙之)‧지평 허사문(許斯文)과 연판(連判)하여, 판사(判事) 최사용(崔士庸)‧소윤(少尹) 윤맹겸(尹孟謙)의 관직은 천망(薦望) 등의 절차를 무시한 이조(吏曹)에서 함부로 조치하여 생긴 일이므로,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첨사원(詹事院)은 승정원(承政院)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함에도 새로이 설치하여 동궁(東宮)과 서무(庶務)를 나누어 처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부득이하여 설치한 것이므로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도록 하였으나, 대신들과 의논도 하지 않고 백성들의 여론도 수렴하지 않은 임금의 처사를 비난하였다.

[참고문헌]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