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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창(黃誠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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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실지(實之)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장수(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신(黃眘)
조부황수신(黃守身)
증조부황희(黃喜)
외조부강석덕(姜碩德)

[상세내용]

황성창(黃誠昌)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실지(實之)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증손으로, 조부는 영의정 황수신(黃守身)이고, 부친은 황신(黃眘)이다. 모친은 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1485년(성종 16)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유생(儒生) 10인과 함께 『서전(書傳)』을 강(講)하였다. 1487년에는 명나라 헌종 황제의 붕서(崩逝)에 대하여 성종이 거애(擧哀: 사람이 죽어 상이 난 것을 알림)와 성복(成服: 상례에서 대렴(大殮)을 한 다음날 상제들이 상복(喪服)을 입는 절차)을 정지한 것이 옳지 않음을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으로서 상소하였다. 1489년 원점(圓點: 성균관 유생의 출석)이 차서 관시(館試: 성균관의 문과 초시로 생원 진사 중 들어온지 만 3백일이 된 이들을 대상으로 하였음)에 응시하였는데 시관(試官)과 상피(相避: 친족 등 가까운 관계의 이들은 같은 곳에서 시험을 치르거나 벼슬하는 일을 피하는 관행)됨으로써 장소를 옮겨 한성시(漢城試)에 나아가서 초장(初場)의 강경(講經)에 합격하였다. 그는 이후 다시 중장(中場)‧종장(終場)은 관시로 보겠다고 하였는데, 강경(講經)에 입격(入格)한 이는 43명이고 관시는 모두 50명을 뽑으므로 시험을 유리하게 보기 위한 계산속으로 시험 장소 변경을 청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벌칙을 받았다. 그러나 해명하는 상소를 올려 과거를 보았으며 149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92년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으로 재직 중 조부 황수신(黃守身)이 받았던 회간대왕(懷簡大王: 덕종(德宗))의 수찰(手札)을 왕에게 성종에게 올리자 술을 내리고 활 한 장(張)을 하사하였다. 이후 연산군 대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집의(執義) 등을 지냈으며, 1504년(연산군 10) 폐비 윤씨의 시호(諡號) 및 능호(陵號)를 추가로 올리는 일에 반대하다가 장 80대 및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중종 대에 복권되어 판결사(判決事), 병조참지 등을 지냈다. 1516년(중종 11)년 6월 14일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같은 날 사헌부에서 그가 합당한 인물이 아님을 아뢰자 왕이 체직을 윤허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