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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질(韓尙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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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질(仲質)
호(號)죽소(竹所)
시호(諡號)문열(文烈)
생년?(미상)
졸년1400(정종 2)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수(韓脩)
조부한공의(韓公義)
외조부권적(權適)

[상세내용]

한상질(韓尙質)
미상∼1400년(정종 2). 고려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호부상서(戶部尙書) 한공의(韓公義)의 손자로,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한수(韓脩)의 아들이며, 모친은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이 그의 아우이고, 세조 때 공신 한명회(韓明澮)는 그의 손자이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을 지내고, 1380년(우왕 6) 좌랑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우상시(右常侍)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6월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망(誣妄)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국호의 결정을 요청하여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받고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都堂)에 모여 국호를 의논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단군‧기자‧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조선이라는 두개의 칭호를 가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품의한 결과,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국호로 선정하였다.

명나라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하였으나, 조선측에서 생각하는 ‘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의 문화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의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태조 1) 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의 첫 수명군주(受命君主)로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時祭)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1393년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楊廣道觀察黜陟使)가 되고, 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이해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었다.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많이 쌓았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집필자]

한영우(韓永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