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지(崔敬止)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ACBDC9C0D1479X0 |
자(字) | 화보(和甫) |
생년 | ?(미상) |
졸년 | 1479(성종 10)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유종(崔有悰)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경지(崔敬止)
미상∼1479년(성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보(和甫). 필선 최유종(崔有悰)의 아들이다.
1460년(세조 6)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1462년 경연에서의 뛰어난 강서(講書)로 가자(加資)되었다.
1464년 시(詩)‧문(文)‧사(史)에 능한 문신을 뽑을 때 시학문에 소속되고, 그해 병조좌랑 재직중 사헌부로부터 “비목(批目)을 서리에게 위임시켜 무단히 출거(出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466년 지평으로 복직하고, 그해 실시한 발영시(拔英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전한에 승진되고, 곧 부응교 겸 경연시강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예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5년(성종 6)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이듬해 문과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고, 1477년 『율려신서(律呂新書)』를 학습할 문신으로 선임되었다.
1479년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곧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주병(酒病)으로 죽었다. 기개가 높고 시명이 있었으며, 세조말∼성종초에 걸쳐 문한직(文翰職)에 있으면서 문운 융성에 공헌한 바 있다.
1460년(세조 6)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1462년 경연에서의 뛰어난 강서(講書)로 가자(加資)되었다.
1464년 시(詩)‧문(文)‧사(史)에 능한 문신을 뽑을 때 시학문에 소속되고, 그해 병조좌랑 재직중 사헌부로부터 “비목(批目)을 서리에게 위임시켜 무단히 출거(出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466년 지평으로 복직하고, 그해 실시한 발영시(拔英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전한에 승진되고, 곧 부응교 겸 경연시강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예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5년(성종 6)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이듬해 문과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고, 1477년 『율려신서(律呂新書)』를 학습할 문신으로 선임되었다.
1479년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곧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주병(酒病)으로 죽었다. 기개가 높고 시명이 있었으며, 세조말∼성종초에 걸쳐 문한직(文翰職)에 있으면서 문운 융성에 공헌한 바 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大東韻府群玉
成宗實錄
國朝榜目
大東韻府群玉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성명 : "최경지(崔敬止)"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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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