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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李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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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미상)
졸년1414(태종 14)
시대조선전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개국공신

[상세내용]

이지(李至)
미상∼1414년(태종 14). 고려조선초의 문신.

일찍이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춘추관에 들어가 사관(史官)으로 복무하였다.

1383년(우왕 9)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올랐는데 한학과 문장에 능하여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 상서원소윤(尙瑞院少尹)을 역임하고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여 밀직사에 오르고, 이듬해 밀직제학에 승진, 하정사(賀正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강릉교주도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392년 공양왕의 세자 석(奭)의 사부가 되었다. 같은해 이성계(李成桂)조선을 창업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를 역임하면서 척불론(斥佛論)을 내세워 유교의 이념화합에 힘썼다.

1393년(태조 2) 조선에 내왕한 명사 황영기(黃永奇)를 배행하고 명나라에 갔다가, 정세문제로 요동에서 돌아왔다.

1396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충청전라경상도 도찰리사(都察理使)가 되어 민정을 시찰하였고, 1398년에는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영농과 양병에 힘썼다.

특히 빈민구제에 힘썼다.

그뒤 충청도도관찰사, 예문관춘추관 대학사를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사헌부대사헌에 발탁, 시무책을 올리니, 첫째 가묘법(家廟法)을 엄히 하고, 둘째 행정을 공평히 하며, 셋째 감찰기능을 강화하고, 넷째 서북면에 대한 진휼책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예문관대제학서북면도순무사를 역임하고, 1405년 호조판서가 되어 경제시책을 정비하였으니, 공신전을 감축하여 재정을 확보하고, 광흥창의 양곡을 풍저창군자감으로의 전용을 금지시켜 녹봉제의 토대를 정비하였다.

1407년 형조판서가 되어서는 공신들의 횡포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며, 그뒤 예조판서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직무에 충실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