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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李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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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403(태종 3)
시대조선전기
본관수안(遂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수산(李壽山)
공신호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상세내용]

이념(李恬)
미상∼1403년(태종 3).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은 수안(遂安).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내고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에 봉해진 이수산(李壽山)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누천(累遷)하여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가 되었으며, 우왕 때에 예의(禮儀)전공판서(典工判書)밀직부사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두루 지냈다.

1392년(공양왕 4)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는데, 팔관회에서 중방(重房)밀직사에게 예대(禮待)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틈이 생겼다. 이에 왕에게 송사(訟事)하였으나 왕이 소장(訴章)을 모두 보유하고 조처를 취하지 않자, 연회에서 만취되어 왕에게 중방의 처벌을 강요하다가 순군(巡軍)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도움으로 합포(合浦)에 장배(杖配)되는 데 그쳤다.

그뒤에 경상도절제사가 되고, 조선건국 후에는 정당문학(正堂文學)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공민왕의 금인(金印)을 변환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태조를 만날 때 예를 잃어 조빙(朝聘)을 못하게 한 죄로 파직되었다.

1394년(태조 3) 다시 등용되어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판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에 예문춘추관태학사로 궁궐에 말을 탄 채로 드나들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398년 신궁을 축조하는 제조관(提調官)이 되었고, 이어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에 이르렀다.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의 일파로 몰려 순군옥에 갇혔다가 흥덕진(興德鎭)에 충군(充軍)되었으며, 이듬해 풀려나왔다.

1400년(정종 2) 이덕시(李德時)와 더불어 덕궁(德宮)에 있던 상왕(上王: 태조)을 자주 찾아가 잡언(雜言)을 함부로 하여 춘주(春州)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