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기(李克基)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DF9AE30D1489X0 |
자(字) | 자안(子安) |
생년 | ?(미상) |
졸년 | 1489(성종 20)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광주(廣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예손(李禮孫) |
외조부 | 박서(朴曙) |
공신호 | 원종공신(原從功臣) |
[상세내용]
이극기(李克基)
미상∼1489년(성종 2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안(子安). 황해도관찰사 이예손(李禮孫)의 아들이며, 모친은 박서(朴曙)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5년 사헌부장령으로서 좌부승지 이영은(李永垠)과 함께 『경국대전』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그해에 종부시소윤, 1466년 의정부검상을 지내고, 1469년(예종 1) 사섬시부정으로서 삼포에 파견되어 왜사신접대사(倭使臣接待事)를 안핵(按覈)하였다.
1470년(성종 1) 문학진흥을 위하여 재행(才行)이 겸비한 인물을 치부(置簿) 하였다가 겸예문관관(兼藝文館官)에 제수하는 겸예문관제의 실시와 함께 이에 선발되고, 1471년 1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에 의하여 “경명행수자(經明行修者)이니 사표직(師表職)에 제수하여야 한다.”고 하여 천거되었으며, 그해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면서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3월에는 강원도도사 최팔준(崔八俊)의 어육증여(魚肉贈與)와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그해 11월 성균관대사성으로 복직, 예문관부제학을 거쳐 1474년 8월 승정원좌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우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77년 8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면서 재차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78년 대사헌으로 입조, 1479년 5월 이조참판, 8월 한성부우윤, 그해 윤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부사(賀正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0년 5월 한성부좌윤, 곧이어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1481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재차 하정사 겸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11월 공조참판에 개수되고, 성균관동지사를 계속하여 겸하였다.
1485년 1월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면서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성균관생들로부터 “계속하여 학업을 지도하게 하여달라.”는 강청(强請)이 있었으나 “치민(治民)도 교회(敎誨)에 못지않다.”는 성종의 뜻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그해 11월 동지중추부사에 체직하였다.
근근봉공(勤謹奉公)하는 성품과 성리학에 정통한 재질로 성균관의 교육에 힘써,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사유자(師儒者)로 칭송되었다.
생원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5년 사헌부장령으로서 좌부승지 이영은(李永垠)과 함께 『경국대전』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그해에 종부시소윤, 1466년 의정부검상을 지내고, 1469년(예종 1) 사섬시부정으로서 삼포에 파견되어 왜사신접대사(倭使臣接待事)를 안핵(按覈)하였다.
1470년(성종 1) 문학진흥을 위하여 재행(才行)이 겸비한 인물을 치부(置簿) 하였다가 겸예문관관(兼藝文館官)에 제수하는 겸예문관제의 실시와 함께 이에 선발되고, 1471년 1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에 의하여 “경명행수자(經明行修者)이니 사표직(師表職)에 제수하여야 한다.”고 하여 천거되었으며, 그해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면서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3월에는 강원도도사 최팔준(崔八俊)의 어육증여(魚肉贈與)와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그해 11월 성균관대사성으로 복직, 예문관부제학을 거쳐 1474년 8월 승정원좌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우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77년 8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면서 재차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78년 대사헌으로 입조, 1479년 5월 이조참판, 8월 한성부우윤, 그해 윤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부사(賀正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0년 5월 한성부좌윤, 곧이어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1481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재차 하정사 겸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11월 공조참판에 개수되고, 성균관동지사를 계속하여 겸하였다.
1485년 1월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면서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성균관생들로부터 “계속하여 학업을 지도하게 하여달라.”는 강청(强請)이 있었으나 “치민(治民)도 교회(敎誨)에 못지않다.”는 성종의 뜻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그해 11월 동지중추부사에 체직하였다.
근근봉공(勤謹奉公)하는 성품과 성리학에 정통한 재질로 성균관의 교육에 힘써,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사유자(師儒者)로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이미지]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명 : "극기(克基)"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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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