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고(南師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C0ACACE0U9999X0 |
호(號) | 격암(格庵) |
생년 | 1509(중종 4) |
졸년 | 1571(선조 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영양(英陽)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남희백(南希伯) |
조부 | 남구주(南九疇) |
[상세내용]
남사고(南師古)
1509년(중종 4)∼1571년(선조 4). 조선 중기의 학자‧도사(道士).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초(景初). 호는 격암(格庵).
조부는 남구주(南九疇), 부친은 남희백(南希伯)이다.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祕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한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 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편저에 『선택기요(選擇紀要)』가 있다.
조부는 남구주(南九疇), 부친은 남희백(南希伯)이다.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祕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한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 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편저에 『선택기요(選擇紀要)』가 있다.
[참고문헌]
芝峰類說
鄭鑑錄
海東異蹟
鄭鑑錄
海東異蹟
[이미지]
[집필자]
양은용(梁銀容)
명 : "사고(師古)"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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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