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중(曺大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B300C911B1549X0 |
자(字) | 화우(和宇) |
호(號) | 정곡(鼎谷) |
생년 | 1549(명종 4) |
졸년 | 1590(선조 2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세명(曺世明)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대중(曺大中)
1549년(명종 4)∼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화우(和宇), 호는 정곡(鼎谷). 본관은 창녕(昌寧).
참봉 조세명(曺世明)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소과에 합격하고,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 전라도도사로 지방을 순시하던 중 보성에 이르러 부안에서 데려온 관기(官妓)와 이별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것이 당시 반란음모로 처형된 정여립(鄭汝立)의 죽음을 슬퍼한 것으로 오해되어,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 장살(杖殺)되었다.
국문을 받던 중 읊은 시가 ‘난언(亂言)’이라 하여 죽은 뒤 추형(追刑)을 당하였다.
참봉 조세명(曺世明)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소과에 합격하고,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 전라도도사로 지방을 순시하던 중 보성에 이르러 부안에서 데려온 관기(官妓)와 이별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것이 당시 반란음모로 처형된 정여립(鄭汝立)의 죽음을 슬퍼한 것으로 오해되어,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 장살(杖殺)되었다.
국문을 받던 중 읊은 시가 ‘난언(亂言)’이라 하여 죽은 뒤 추형(追刑)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윤용혁(尹龍爀)
성명 : "조대중(曺大中)"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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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4-23 | 문과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본관을 옥천(玉川)에서 창녕(昌寧)으로 고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