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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신(李濟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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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몽응(夢應)
호(號)청강(淸江)
시호(諡號)평간(平簡)
생년1536(중종 31)
졸년1584(선조 17)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문성(李文誠)
저서『청강집』
저서『청강소설』
저서『진성잡기(鎭城雜記)』

[상세내용]

이제신(李濟臣)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 병마사 이문성(李文誠)의 아들이며, 영의정 상진(尙震)의 손자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7세 때에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조식(曺植)이 한번 보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17세 때 용문산으로 조욱(趙昱)을 찾아가 학업을 닦고,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 이어서 156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예문관검열성균관전적형조정랑공조정랑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선조가 즉위하여서는 예조정랑으로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오상상(吳祥常)이 신망하여 사은사종사관으로 선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1년(선조 4) 울산군수가 되어서는 아전들의 탐학을 근절시키고, 백성들의 불편을 없애는 데 힘썼다.

1578년 진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펴서 공이 많았는데, 이때 토호들의 모함으로 병부(兵符)를 잃고 벼슬을 사임, 향리에 은거하였다.

1581년 강계부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서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1583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는 행서‧초서‧전서‧예서에 모두 뛰어났다.

1584년 경연관 이우직(李友直)의 특청으로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청백리에 책록되었다. 양근미원서원(迷原書院), 청주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강집』『청강소설』『진성잡기(鎭城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과천의 「상붕남묘비(尙鵬南墓碑)」와 「이현령인손묘갈(李縣令仁孫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이미지]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명 : "제신(濟臣)"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1願赴防六鎭者滿三年庶孼許通赴擧公私賤從良而私賤代給公賤兩司請勿擧行上從之○備邊司請罷北兵使李濟臣以爲濟臣以書生當邊警措置疏漏請罷職以金禹瑞代之上不從○賊胡圍慶源府穩城府使申砬領輕兵先赴援入城賊圍之三匝砬兵
紀年便攷v17李壽俊濟臣子明宗己未生字台徵號志范堂又龍溪成渾門人宣祖己卯生貟庚寅登增廣官止通政永興府使風儀徳望克肖乃父孝反義
國朝捷錄v01象村平山人以七臣放敀反正首拜吏判卒世子臨喪癸亥拜領文貞公東陽尉父憲朝七代祖承緖子宋麒壽外孫冕祖晸祖 濟臣
國朝捷錄v01府尹士寬之子見上全城君恕長兄淸江濟臣曾祖文科
郯述v02癸酉濟臣曾甲戌拜副學
國朝人物志v2濟臣子己卯進士庚辰文科性剛介負氣義聞人善立以爲己師見人惡如己讎挺然自立不隨世涼熱去就母患疽日夜不解
國朝人物志v2字稽天全義人濟臣子光海朝坐門禍謫洪原九年始歸癸亥改玉授監役至都事
國朝人物志v3字士致號西華全義人淸江濟臣曾孫庚戌進士光海丁巳文科仁祖丁丑虜變亂兵直逼行宮請出前日斥和臣以與虜行遠拔劍叱退
國朝人物志v3字士謙號止菴全義人寺正厚基子濟臣曾孫仁祖甲子生員乙亥文科丙戌重試孝宗入東宮妙選宮僚行進首膺焉官至吏曹參判人物考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