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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일(鄭惟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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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중(子中)
호(號)문봉(文峰)
생년1533(중종 28)
졸년1576(선조 9)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목번(鄭穆蕃)
저서『한중록(閑中錄)』
저서『관동록(關東錄)』
저서『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저서『문봉집』

[상세내용]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1576년(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峰).

정목번(鄭穆蕃)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이 되고, 155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진보예안현감을 거쳐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그뒤 설서정언직강지평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0년(선조 3)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듬해 사인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대사간승지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부(詩賦)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또한 성리학에 있어서도 사문(師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함으로써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이 사단(四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이것을 타는 것이 칠정(七情)이라 주장한 퇴계설을 추종, 발전시켰다.

관직을 물러난 뒤 『한중록(閑中錄)』『관동록(關東錄)』『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안동백록리사(栢麓里祠)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문봉집』, 편서로는 『명현록』이 있다.

[참고문헌]

東儒師友錄

[집필자]

이순두(李純斗)
대표명정유일(鄭惟一)
유일(惟一)
성명정유일(鄭惟一)
자중(子中)
문봉(文峯)

명 : "유일(惟一)"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靑野만集v4謹按鄭惟一鄭琢金就礪雖曰遊李滉之門而實非道學弟子也惟一粗雜無檢制琢昏弱無執守況就礪諂佞只趨走服勞而已以三人名之曰弟子爲李滉之辱不亦甚乎
寒臯觀外史v19度朝㒲先生稱其志尙云官寺正就礪亨靜庵安山人逸執義謹按鄭惟一鄭琢金就礪雖曰游李 滉之門而宲非道學弟子也惟一粗雜旡檢制琢昏弱旡執守况就礪謟侫只趍走服勞而已以此
寒臯觀外史v29字晉生吳人能文詩工書藝踏遍天下 名山大川自號北海韓小宰世能癸酉頒詔于東 方北海従而來時權習齋擘鄭文峯惟一柳西厓 相公爲従事石峯韓濩以善冩亦随焉北海與四 公相得懽甚累以詩文酬唱時仲氏爲太史入侍 記事捷給詔使
寒臯觀外史v29擘字大斗安東人官監司惟一字子中東萊人官大諫濩字景 浩三和人進士官護軍継輝字重晦號黃崗光州人官大憲純彥譯官南陽人光國勳
寒臯觀外史v34奉緣之子并退溪門人子中名惟一號文峯東萊人塘惟吉族之弟官大諫敬夫名宇宏號開巖義城人官副學肅夫名宇顒號東岡官吏參謚文貞
寒臯觀外史v60惟一字子中號文峯東萊人官大諌鳯齡字景瑞號栢潭號城人官吏參
寒臯觀外史v67忠謙字公直號四養堂青松人官兵判諡忠翼惟吉字吉元號林塘東萊人官左相惟一字子中號文峯東萊人官大諫成龍字而見號西厓豊山人官領相諡文忠孹字大手號習齋安東人官戶議拭字清之號損庵全
國朝人物志v2官至都承旨有古遺直風康陵喪畢將祔太廟首相李浚慶議奉孝陵于延恩殿人莫敢貳惟一獨毅然倡言直斥浚慶之非典禮賴以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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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