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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鄭芝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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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연지(衍之)
호(號)남봉(南峰)
생년1525(중종 20)
졸년1583(선조 16)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유인(鄭惟仁)
증조부정광필(鄭光弼)

[상세내용]

정지연(鄭芝衍)
1525년(중종 20)∼1583년(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으로, 봉상시정 정유인(鄭惟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중호(李仲虎)로부터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는 가장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이황(李滉)서경덕(徐敬德)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 출입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66년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569년(선조 6)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나이 43세에 이르러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지평부교리헌납집의직제학 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뒤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으니, 관직에 나온 지 15년 만에 정승자리에 오른 예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583년 신병이 깊어짐에 따라 거듭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그 역시 병중에서도 글로써 국사(國事)를 논의하다가 그해 57세로 죽었다.

죽음에 이르러 왕이 대신할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李珥)를 인재로 천거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을 잘라 말한 다음, 그의 기질을 적절히 알아서 쓴다면 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癸甲日錄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명 : "지연(芝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0書李山海病不參政參判鄭琢曰當以首相之薦首擬正郞李純仁固爭之曰兩相俱薦爲重乃以尹毅中首擬朴謹元次之繼輝芝衍又次之爲四望毅中旣有貪名而謹元亦輕巧甚爲士類所賤且於仁聖王后之喪謹元爲守陵官懷戀妻妾至發心病以至於遞
國朝編年v11謂爾何如人也雖論之十年豈有可從之理乎不如速爲停論○右相鄭芝衍卒有疾上遣承旨問病且問所欲言者擧所以自代芝衍回啓曰李山海早有公輔之望可大用且曰無係好惡之偏永享和平之福上遣史官回諭曰卿言儘是嘉猷予當體念又使錄事
紀年便攷v27芝衍庶子致藩之孫宣祖以御事承嫡
國朝人物志v2之孤忠計熟歸田欲全歐陽之晩節戊子卒年七十四相臣錄文翼公每食以其餘只令孫惟吉曾孫芝衍食之他子弟不得焉
國朝人物志v2安郡守貪黷無厭及拜靑松厭其邑殘欲不往而又恐被罪陰嗾臺諫啓曰愼元病重不可赴邑請遞任芝衍曾見愼元無疾明知諫官被囑不勝其憤乃啓曰諫官雖啓以有病而愼元實無病於是兩司譁然攻
國朝人物志v2號柳谷宗室壽昌副守枰子鎭南君終生玄孫鄭文翼光弼每食以其餘只令孫惟吉曾孫芝衍食之他子弟不得與李完城憲國少時以族孫往省方飯二公適不在食訖熟視完城呼侍婢輟而與之完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11-15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1527년에서 1525년으로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