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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극성(姜克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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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실(伯實)
호(號)취죽(醉竹)
생년1526(중종 21)
졸년1576(선조 9)
시대조선전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복(姜復)
4대조강희맹(姜希孟)
외조부김안국(金安國)

[상세내용]

강극성(姜克誠)
1526년(중종 21)∼1576년(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실(伯實), 호는 취죽(醉竹). 우의정 강희맹(姜希孟)의 4대손. 부친은 사용(司勇) 강복(姜復)이며, 모친은 김안국(金安國)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년 뒤 다시 중시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처음 예문관에 뽑혔다가 곧 홍문관정자로 옮겼으며, 1555년에는 김귀영(金貴榮)이량(李樑) 등과 함께 사가독서한 뒤 이듬해 부수찬에 올랐다.

이어 문학지평부교리교리부응교장령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1563년 검상사인을 거쳐 군자감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생활은 당시 권세를 잡고 전횡하던 이량을 추종한 결과였으며, 사신(史臣)들은 그를 이량의 무리였기 때문에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1564년 이량이 축출당하자 계속적인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으며, 1574년 조정에서 파직된 그의 재서용 논의가 시작되어 대간의 반대가 있기도 했지만, 과거급제자인 점이 고려되어 다시 관직에 나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장단도호부사를 지냈다.

행신(幸臣) 이량과의 친분으로 많은 비난과 역경을 겪었다. 사가독서 때 사온(賜醞)에 취해 있다 해질녘에 깨어나 겨우 지어 바친 시로 명종으로부터 찬탄과 함께 말 한필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