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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朴淳){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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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화숙(和叔)
호(號)사암(思菴)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523(중종 18)
졸년1589(선조 22)
시대조선전기
본관충주(忠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우(朴祐)
저서『사암집』

[상세내용]

박순(朴淳)
1523년(중종 18)∼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우윤(右尹) 박우(朴祐)의 아들이며, 목사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1553년(명종 8)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홍문관수찬교리의정부사인(舍人) 등을 거쳐,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제정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직제학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뒤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에 연구가 깊었고,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더욱 능하여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하였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錦城誌
思菴集
白沙集(李恒福)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호 : "사암(思菴)"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3朴淳祐子中宗癸未生字和叔少號青霞子後改思菴又雙松徐敬德門人後事李滉滉曰相對如一條清氷八歲吐辭驚人中宗庚子十八進士明宗癸丑魁親試選湖堂歴舎人銓郞
國朝人物志v2當兩司中學一會入廳下竊聽說話通于李芑元衡輩或言乙巳之禍寶成守搆成云云百齡死命議諡思菴朴淳諡以恭昭議上元衡倡言曰國之元勳諡無忠字意在叵測遂請鞫治安玹力救得免朝野輯要
國朝人物志v2字義伯鐵原人從思菴朴淳學篤信好古隱居敎授自號困齋朝廷聞其賢召至京師拜典牲主簿上疏言道德立本之說
國朝人物志v2字士強號畏菴瑞山人丁卯司馬自知爲學質業於思菴朴淳學益進平居築一室扁曰愛日儼然危坐莅官尙廉潔居家崇禮敬與人寡合一代髦士無不景附最受知於
國朝人物志v2御史再任督運得穀數十萬石明兵賴不乏糧管下官皆蒙賞典而獨不與焉未嘗自言嘗遊牛栗門大爲嘉賞思菴朴淳才之嘗欲大用守豐基有訟者結權貴積年不決以中按法立斷觀察使屢請不改精於
國朝人物志v3宣祖朝巽菴沈義謙居西門外爲西人省菴金孝元居東村駱峯下爲東人而松江鄭澈思菴朴淳黃岡金繼輝柏潭具鳳齡梧陰尹斗壽月汀尹根壽藥圃李海壽靑蓮李後白拙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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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