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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許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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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휘(太輝)
호(號)초당(草堂)
생년1517(중종 12)
졸년1580(선조 13)
시대조선전기
본관양천(陽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허한(許瀚)
저서『초당집』
저서『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상세내용]

허엽(許曄)
1517년(중종 12)∼1580년(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군자감부봉사 허한(許瀚)의 아들이며, 허봉(許篈)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으로 서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년 지제교를 겸하였을 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이해 동부승지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서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동‧서인(東西人)의 대립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당시 사류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벼슬을 30년간이나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였다.

『율곡집』에 보면 이론이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文義)에 잘 통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황(李滉)은 학문 토론에 접하여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박순(朴淳)과는 동문이었으나 당파가 서로 달라 사이가 벌어졌고, 말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초당집』『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東儒師友錄
知退堂集
栗谷全書
蘇齋集
眉巖日記
溪峰全書
南溪集

[이미지]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