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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신(盧守愼)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178C218C2E0B1515X0
자(字)과회(寡悔)
호(號)소재(穌齋)
호(號)이재(伊齋)
호(號)암실(暗室)
호(號)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諡號)문의(文懿)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515(중종 10)
졸년1590(선조 23)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주(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노홍(盧鴻)
처부이연경(李延慶)
저서『소재집』

[상세내용]

노수신(盧守愼)
1515년(중종 10)∼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며, 부친은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에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하여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대학장구(大學章句)』『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 학문이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하였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禫祭)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봉암사(鳳巖祠), 괴산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蘇齋集
栗谷全書
東儒師友錄(朴世采)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朝鮮名臣錄(李章薰)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71)

[집필자]

유남상(柳南相)

호 : "소재(蘇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0國則是暴揚國惡也初欲置極律幷流于遠方○右議政盧守愼辭疾免相副提學李山海問珥曰蘇齋遆相有關於時事否珥曰蘇齋不能建明人多少之但今世雖經世之才居相位亦安能有所爲乎譬如工匠則蘇齋乃拱手坐食者也雖無益亦無害蘇齋遆後
紀年便攷v11盧守慎光州人嵩八世孫别提鴻子中宗乙亥生李延慶婿字寡悔號蘇齋又伊齋又暗室又茹芝老人李滉門人又受學于延慶及李耔中宗甲午二十進士癸卯魁明經科選湖堂歴銓郞直學聡明博學
國朝人物志v2可傳然敎授之廣有功於斯門不入於黨論亦是高處其視龜峯所處得失懸殊當爲近來庶流學問中之第一蘇齋盧守愼遇之最厚守愼問曰宋應漑攻李僉知珥外議何如公曰時論雖詆李公李公不可
國朝人物志v2告者力救之自號四耐耐困耐飢耐寒耐暑也名山大川無所不往出入晦齋退溪栗谷牛溪之門又與南冥蘇齋遊東儒師友錄
國朝人物志v2居昌愼希復女生言愼踰弱冠慨然闢佛請誅妖僧普雨篤爲己之學眉菴柳希春草堂許曄蘇齋盧守愼之門無不追隨師事退溪多有問答丁卯生員丁丑文科歷檢閱官至吏曹判書請治郭再祐
國朝人物志v2字寡悔號蘇齋光州人別提鴻子右相嵩之後聰明博學爲文章尤深於經術未成童以文學名年十七灘叟李延慶
國朝人物志v2字伯懼號一松靑松人鍵子蘇齋盧守愼謪謫海島喜壽冒鯨濤躬進受學庚午進士壬申文科選入湖堂己丑汝立獄多濫滯喜壽
國朝人物志v3坰柳根芝川黃廷彧白沙李恒福等扶沈故謂之西黨而草堂許曄東岡金宇顒鵝溪李山海蘇齋盧守愼西厓柳成龍鶴峯金誠一東岩李潑坡谷李誠中丹厓李敬中德溪吳健梧里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