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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宋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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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지(誠之)
호(號)기촌(企村)
호(號)면앙정(俛仰亭)
시호(諡號)숙정(肅定)
생년1493(성종 24)
졸년1582(선조 15)
시대조선전기
본관신평(新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태(宋泰)
출신지담양
저서『면앙집』

[상세내용]

송순(宋純)
1493년(성종 24)∼1582년(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 출신. 증이조판서 송태(宋泰)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윤원형(尹元衡)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피출(被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때 기대승(奇大升)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를,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나주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에 들고, 1568년(선조 1)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승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盧禛)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때 담양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는데, 특히 그는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단가(시조) 20여수를 지어 조선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遣閑雜錄(沈守慶)
稗官雜記(魚叔權)
旬五志(洪萬宗)
芝峰類說(李睟光)
竹窓閑話(李德泂)
韓國詩歌史綱(趙潤濟, 乙酉文化社, 1954)
國文學全史(李秉岐‧白鐵, 新丘文化社, 1957)
湖南歌壇硏究(丁益燮, 進明文化社, 1975)
壬亂前後歌辭硏究(金東旭, 震檀學報 25‧26‧27, 1964)

[집필자]

정익섭(丁益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