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명윤(金明胤)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BA85C724B1493X0
자(字)회백(晦伯)
생년1493(성종 24)
졸년1572(선조 5)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극픽(金克愊)
공신호을사추성정난공신(乙巳推誠定難功臣)

[상세내용]

김명윤(金明胤)
1493년(성종 24)∼1572년(선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회백(晦伯).

좌참찬 김극픽(金克愊)의 아들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정자(副正字)저작(著作)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 후 현량과가 파과(罷科)된 뒤에 음직(蔭職)으로 남아 있다가, 다시 152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모든 현량과 출신들이 쫓겨났으나 홀로 조정에 남아 있어서 사림의 비난을 받았다.

그뒤 1525년 형조좌랑에 이어 예조참의도승지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연간에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역으로 윤임(尹任)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을 추대하여 대위(大位)를 엿본다고 무고하여, 이른바 을사추성정난공신(乙巳推誠定難功臣)이 되어 광평군(光平君)으로 봉해졌고, 개성유수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호조참의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그뒤 다시 병조판서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의정부좌찬성지경연사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중종실록』에는 “오직 시의(時議)에 따라 붙는 것으로 발신(發身)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가 즉위하자마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 1567년(선조 즉위)에 삭탈관직의 주장이 있었고, 죽은 뒤에 충훈부(忠勳府)에서 대신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논란이 일어났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