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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南褒)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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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미(士美)
호(號)지지당(知止堂)
생년1459(세조 5)
졸년1540(중종 35)
시대조선전기
본관의령(宜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남치신(南致信)

[상세내용]

남포(南褒)
1459년(세조 5)∼1540년(중종 3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미(士美), 호는 지지당(知止堂).

부친은 곡산군수 남치신(南致信)이며, 영의정 남곤(南袞)의 형이다.

1489년(성종 20) 양시에 합격하고 1502년(연산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공조낭관홍문관직제학을 지내고, 1506년 중종반정 후에는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지냈다.

그뒤 나라일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을 끊고, 청맹(靑盲)이라 핑계하여 벼슬하지 않고 적성(積城) 감악산(紺岳山)에 가서 은둔하였다. 항상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면서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소요자(逍遙子)라고 일컫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없었다.

병으로 눕자 아들 남정진(南廷縉)이 임지인 곡산(谷山)으로부터 와서 모셨다. 그는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네가 여덟번 고을 벼슬을 제수받아 세번을 사양하고, 다섯번 나간 것은 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우리 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살아가기 충분할 것이니 내 죽은 뒤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말라. 그리고 묘갈(墓碣)에는 단지 공조(工曹)의 옛 직함만 쓸 것이고,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은 살아서도 취임하지 않았으니 쓰지 말라.”고 하였다.

뒤에 명종이 말하기를 “고(故) 직제학 남포는 물러나는 절개가 가상하고, 그 아들의 청백함은 옛사람이라도 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상을 내렸다. 권신 남곤의 아우였으나 권세에 물들지 않고 깨끗이 살아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권인혁(權仁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