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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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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이역(李懌)
자(字)낙천(樂天)
봉호진성대군(晉城大君)
생년1488(성종 19)
졸년1544(중종 39)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
단경왕후(端敬王后)
처2장경왕후(章敬王后)
처3문정왕후(文定王后)
처부신수근(愼守勤)
처부2윤여필(尹汝弼)
처부3윤지임(尹之任)
묘소고양(高陽)
묘소광주(廣州)

[상세내용]

중종(中宗)
1488년(성종 19)∼1544년(중종 39). 조선 제11대왕. 재위 1506년∼1544년. 이름은 이역(李懌). 자는 낙천(樂天).
1. 가계
성종의 둘째 아들이고, 모친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며,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이다.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고,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하여졌다.
2. 왕도정치의 개혁
1506년 9월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연산군 때의 여러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하여 홍문관을 강화하는 동시에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며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515년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하여 기성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친히 김식(金湜) 등 유능한 신진사류 28명을 뽑아 언론‧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하여, 이른바 이들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3. 세력간의 갈등
그러나 이들 신진사림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문제(僞勳削除問題)를 계기로 1519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나라를 뒤집어놓았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신진사림세력이 숙청됨으로써 개혁정치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고,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대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각종 옥사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 심정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尹世昌)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심정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애매한 경빈박씨(敬嬪朴氏)복성군(福城君)이 쫓겨나 원사(怨死)하는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1531년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이에 대립하여 중종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형제가 등장하여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김안로가 추방되었으며,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의 전주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중종대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나와 훈구세력과 신진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상호간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간의 세력다툼 등이 일어났다.
4. 국방의 혼란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1510년 4월에 삼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薺浦)부산포(富山浦)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을 공격하는 등의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일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난으로 말미암아 조선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를 반감하는 동시에 항거왜의 삼포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왜변이 자주 일어났다.

즉, 1522년 5월 추자도왜변(楸子島倭變)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왜변 등이 빈발하고,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하여 인마(人馬)를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기왕의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한편, 북방 국경지대의 야인(野人)의 침구도 빈번하여졌다.

1512년 야인이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여러 차례의 침입이 있었다.
5. 국방체제의 정비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四郡)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六鎭) 지대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義州山城)을 수축하여 북방방어에 노력하였으며,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야인들은 생활여건이 나은 6진‧4군지대로 부단히 침입하여 들어와 때로는 만포첨사(滿浦僉使)가 피살되는 등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같이 남왜북로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자 왕권호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였으며,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특히 비변사는 처음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들이 모여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 이의 방어에 대한 의논을 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뒤에 영설(永設)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화되었다. 이밖에도 한때 무학(武學)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편조전(鞭條箭)‧벽력포(霹靂砲) 등을 제작하여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국내의 군사질서가 허물어져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이 행하여지는 등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노출되었다.
6. 사회‧법률제도의 확립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조광조 등을 등용하였던 초기에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였으며, 도성 안의 요승(妖僧)‧무가(巫家)를 적발,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면서 유교주의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화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그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이륜행실(二倫行實)』『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 등을 간행하여 국민교화에 힘쓰고, 말년에는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그리고 오랜 재위기간 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이 편찬, 간행되었다.

즉, 최세진(崔世珍)신용개(申用漑)이행(李荇)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四聲通解)』『속동문선(續東文選)』『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하여 권선징악을 중심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하여 역사‧지리‧언어‧문학‧사회의 각 방면의 문헌들이 편찬, 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대전속록』 등을 인간하고, 1540년 역대의 실록을 등사하여 사고(史庫)에 배치하는 동시에 1542년 근정청(斤正廳)을 설치하여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해 7월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7. 경제 및 농업‧기술의 발달
경제면에 있어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1524년에는 전라도강원도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복‧음식‧혼인 등에 대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관리들의 신래자(新來者)에 대한 침학을 금지하는 등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과 잦은 외침 등으로 실효를 크게 거둘 수가 없었다.

특히 중종 때의 특기할 사실은 1530년 4월에 당시 들어오기 시작하였던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무역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는 지배층의 의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

또한,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도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습득해오게 하였으며, 1536년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하여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에는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양위하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죽었다. 능은 처음 고양(高陽)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 광주(廣州)로 이장하고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세 왕비와 빈(嬪)에게서 인종명종을 비롯하여 9남11녀가 태어났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寶鑑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星湖僿說類選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