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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경(李延慶)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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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장길(長吉)
호(號)용탄자(龍灘子)
시호(諡號)정효(貞孝)
생년1484(성종 15)
졸년1548(명종 3)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주(廣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수원(李守元)
조부이세좌(李世佐)

[상세내용]

이연경(李延慶)
1484년(성종 15)∼1548년(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의 손자이며, 도사 이수원(李守元)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518년 방환(放還)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하여 ‘원사인자손(寃死人子孫)’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고,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하였을 때 재상을 선출하는 문제가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일파의 인력(引力)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하여,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하였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귀양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그의 문하가 되었다. 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은 그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大東野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朝鮮前期畿湖士林派硏究(李秉烋, 一潮閣, 1984)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