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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두(崔山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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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앙(景仰)
호(號)농중자(籠中子)
생년1483(성종 14)
졸년1536(중종 31)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양(光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최한영(崔漢榮)
외조부한경회(韓敬澮)
저서『신재집(新齋集)』

[상세내용]

최산두(崔山斗)
1483년(성종 14)∼1536년(중종 3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

부친은 한성판윤 최한영(崔漢榮)이며, 모친은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사숙하였다.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사인(舍人)’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15세 때 『통감강목(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번을 읽고 나오니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니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洛中君子)’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가 되어 25세에서 30세까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나자,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

1513년(중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 홍문관저작, 1516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 이조정랑장령사인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재집(新齋集)』이 있다. 동복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동길(李東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