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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량(鄭忠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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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간(國幹)
생년1480(성종 11)
졸년1523(중종 18)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광세(鄭光世)

[상세내용]

정충량(鄭忠樑)
1480년(성종 11)∼1523년(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간(國幹). 형조판서 정광세(鄭光世)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를 거쳐 1506년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 검열에 임용된 뒤 대교를 거쳐 1507년(중종 2) 봉교가 되었다.

이때 동료 김흠조(金欽祖)와 함께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伸寃)과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보장해줄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뒤 전적공조좌랑형조좌랑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황해도도사병조정랑공조정랑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뒤, 1511년 헌납이 되었다.

그뒤 지평장령집의승문원참교내자시정(內資寺正)사섬시정(司贍寺正)사재감정을 역임하였다.

1518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으나,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탄핵을 받아 곧 이조참의로 옮겼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대간의 탄핵으로 공조참의로 피척(被斥)되어 수년 있다가 죽었다.

침착하고 행동이 곧으며 말이 없고 근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잘못을 들추지 않고 담박(淡泊)하여 명리에 급급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典故大方
己卯錄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