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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朴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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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창방(昌邦)
호(號)육봉(六峰)
생년1476(성종 7)
졸년1547(명종 2)
시대조선전기
본관충주(忠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지흥(朴智興)
출신지광주(光州)

[상세내용]

박우(朴祐)
1476년(성종 7)∼1547년(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진사 박지흥(朴智興)의 아들이다. 광주(光州) 출신.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10년(중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병조정랑장령(掌令)집의(執義)성균관사예를 거쳐 성균관사성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직제학좌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하여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때 권세가인 허확(許確)전주부윤이 되어 내려왔으나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허항(許沆) 등이 재삼 초청하였으므로 마지못해 잠시 그들을 찾아보고 곧 돌아와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복직하였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그때 허항이 전날의 감정으로 모함하여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시 병조참의로 복직되니, 허항이 또한 모함을 하여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교화하여 왕이 표리(表裡)를 내려 포상을 하였다. 그로부터 해주 지방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뒤 성균관대사성병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우윤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인종 때에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명종 때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성정이 곧아 웃사람에게 아첨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세도가인 김안로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으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