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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현(閔懷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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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사(季思)
생년1472(성종 3)
졸년1540(중종 35)
시대조선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질(閔質)
출신지예산

[상세내용]

민회현(閔懷賢)
1472년(성종 3)∼1540년(중종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계사(季思). 예산 출신.

사직 민질(閔質)의 아들이다.

1517년(중종 12) 충청감사 김근사(金謹思)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이듬해 군자감주부를 거쳐 감찰이 되었다.

이때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안내로 중종을 배알하였다. 그는 왕에게 백성을 안락하게 함을 치도(治道)의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집권층은 천거로 출사(出仕)하고 있던 인물들에게 법제적 자격을 보강해주기 위하여 1519년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이때 경향(京鄕) 각지로부터 천거된 120인 가운데서 28인을 등용하였는데, 47세의 나이로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그의 천목(薦目)에는 “지조가 순수하며 독실하고, 또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기묘사화로 출신자 방목(榜目)이 혁파되어 직첩과 홍패(紅牌)를 몰수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한거하였다.

그뒤 20년이 지난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건의에 따라 직첩을 환급받고 좌랑에 복직되었다. 그가 파과(罷科: 과거가 무효됨.)된 뒤 고향에서 한거하고 있을 때 결성현감(結城縣監) 조우(趙佑)가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수차에 걸쳐 모시려 하였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바른 것을 굳게 지켜 동요됨이 없었으며, 겉으로는 온화하나 속은 강하여 1만명의 군사로도 움직이지 못하였다. 어떤 일을 당하였을 때 모가 나지 않는듯하였으나, 정도를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는 것이 태산보다 무거웠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賢良科及第者의 性分(李秉烋, 大丘史學 12‧13, 1977)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