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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형(韓承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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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형부(亨父)
생년1467(세조 13)
졸년1527(중종 22)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한사무(韓士武)

[상세내용]

한승형(韓承亨)
1467년(세조 13)~1527년(중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형부(亨父)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출신지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 현 성남(城南))이다.

증조부는 세종 때 병조참의(兵曹參議)‧예조참판(禮曹參判)‧전라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낸 한혜(韓惠)이고, 조부는 예종 때 남이(南怡)를 제거한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에 책봉되었으며 서거정(徐居正)과 교분이 두터웠던 한계희(韓繼禧)이다. 부친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낸 한사무(韓士武)이고, 동생은 한승정(韓承貞)‧한승인(韓承仁)‧한승의(韓承義)이다.

1507년(중종 2)에 정시에서 1등으로 합격한 후 직부전시를 명받고 그 해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2등 7위로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 이후 정3품 당하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로 내섬시정(內贍寺正)에 올랐는데, 언관들이 3품의 고위 품계로 관로의 시작부터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조급한 승진이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법령에도 어긋나는 처사라며 체임할 것을 요구하였다. 1515년(중종 10)에 상의원정(尙衣院正)의 자리에 올랐는데, 같은 이유로 간관들의 간언이 이어지자 임되었다.

1520년(중종 15)에 다시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냈다. 1523년(중종 18)에 다시 외직에 부임되는 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기피하였따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城南市) 분당구(盆唐區) 서현동(書峴洞)에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