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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金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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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옥이(玉耳)
시호(諡號)공절(恭節)
생년1465(세조 11)
졸년1532(중종 27)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태경(金泰卿)

[상세내용]

김당(金璫)
1465년(세조 11)∼1532년(중종 2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옥이(玉耳).

부친은 목사 김태경(金泰卿)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성균관학록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4년 예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이듬해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도시첨정성균관사예승문원교감 겸 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역임하였는데, 봉교 이후 계속하여 사직(史職)을 겸임하였다.

1506년 성균관사성 겸 승문원참교를 거쳐 중종반정 후 사간이 되었으나, 김세필(金世弼)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봉상시부정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장례원정으로 오른 후 이듬해 홍문관전한, 그 이듬해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

1512년(중종 7)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경직에 다시 들어왔다. 이어 한성부우윤, 경기도전라도경상도관찰사대사헌공조형조병조호조예조참의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1519년 기묘사화 때에는 호조참의로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처벌에 참여하여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명나라정조사(正朝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526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한 후 좌참찬이 되었으며, 우찬성판의금부사오위도총관을 거쳐 좌찬성으로 재임중 죽었다.

성품이 청렴, 솔직했으나, 일관된 마음가짐이 없었다는 사신(史臣)의 평가를 받았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