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화의군(和義君)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54C758AD70B1425X0
이명(異名)이영(李瓔)
자(字)양지(良之)
시호(諡號)충경(忠景)
생년1425(세종 7)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자
영빈 강씨(令嬪姜氏)
조부이윤(李綸)
처부박중손(朴仲孫)

[상세내용]

화의군(和義君)
1425년(세종 7)∼미상.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아홉째 왕자.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

모친은 영빈 강씨(令嬪姜氏)이다. 박중손(朴仲孫)의 사위이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에 봉해지고, 1436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41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민간 여인에게 남복(男服)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였다.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고, 1449년 조관(朝官)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가 1450년(문종 즉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다.

1455년(단종 3)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첩 초요경(楚腰輕)과 사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부처(付處)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같은해 세조가 즉위하면서 대간(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혜빈양씨(惠嬪楊氏)와 결탁하여 국기(國基)를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1456년 사면되고, 같은해 상왕(上王: 단종) 복위사건에 참가한 뒤에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교살(絞殺)되자 이에 연루되었다.

1482년(성종 13) 윤사흔(尹士昕)의 탄핵으로 외방종편(外方從便)되었고, 1484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에 따라 경외종편되었다.

그뒤 『선원록(璿源錄)』에 이름만 오르고 직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 13) 손자 이윤(李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하였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일찍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의 한글 창제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中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璿源系譜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10-30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내용을 따라 "박팽년(朴彭年)의 매부이다." 삭제. 박팽년은 全彌의 딸과 결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