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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문(曺錫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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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순보(順甫)
시호(諡號)충간(忠簡)
생년1413(태종 13)
졸년1477(성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항(曺沆)
공신호좌익공신(佐翼功臣)
공신호적개공신(敵愾功臣)
공신호익대공신(翊戴功臣)
공신호좌리공신(佐理功臣)

[상세내용]

조석문(曺錫文)
1413년(태종 13)∼1477년(성종 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순보(順甫). 관찰사 조항(曺沆)의 아들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에 이어 집현전부수찬사간원정언이조형조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장단에 물러가 있자 조정에서 그 재주를 애석히 여겨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삼았다.

치적이 출중하였으므로 홍주목사에 특진되었으며, 또한 관찰사의 추천으로 그 치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상호군지형조사(知刑曹事)에 승진되고, 곧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할 때 가담,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고 1457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459년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야인(野人)에게 관직을 수여한 일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이조참판으로서 주문사(奏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호조참판에 임명,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뒤에 호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461년 호조판서로서 중외탁지사(中外度支事)를 총령(總領)하게 되고, 1466년 우찬성에 임명, 호조판서를 겸직하게 되었다. 호조판서를 겸직하게 한 것은 오랫동안 그 직책에 근무하여 회계사무에 밝고 국가의 재정을 유족하게 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이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서 출정하였으나 함흥에 주둔만 하고 전진하지 않아 여러 장수들의 불평이 많았다. 돌아오자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써 적개공신(敵愾功臣)1등에 책록되고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뒤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정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써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1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면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