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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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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도(李祹)
이명(異名)이도(李裪)
자(字)원정(元正)
시호(諡號)장헌(莊憲)
생년1397(태조 6)
졸년1450(세종 32)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원경왕후(元敬王后)
소헌왕후(昭憲王后)
처부심온(沈溫)

[상세내용]

세종(世宗)
1397년(태조 6)∼1450년(세종 32). 조선 제4대왕. 재위 1419년∼1450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1. 가계
태종의 아들이며, 모친은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고,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2.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한 세자의 일련의 행동과 일들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또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즉,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성녕(誠寧) 등 네 대군이 있었는데, 이때 양녕대군은 벌써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세자폐립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 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내선(內禪)을 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3. 유교정치의 기틀마련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하여 있었으므로 태종의 영향이 계속된 시기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룩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는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약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인데,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1436년(세종 18)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1436년(세종 18)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개혁된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고, 이듬해는 세자(世子: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도록 하였으며 그 이전에 비하여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하게 되어갔다.

따라서, 언관(言官)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비교적 강경한 자세를 보였던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동원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룩되어 유교정치기반이 진전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정치체제로 변화하게 된 더 중요한 원인은 왕의 건강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일찍이 신병때문에 고통을 받아왔으므로, 정무가 왕에게 폭주하는 육조직계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기틀은 정치적‧제도적‧문화적 기반의 성립, 왕권의 안정, 그리고 왕의 건강의 악화 등에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세종 전반기와 그 후반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후반기에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 최윤덕(崔潤德)신개(申槩)하연(河演)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고, 관료들의 정치기강도 그 전후에 비하여 건전하였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와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데 작용한 요소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집현전세종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집현전중국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제도였고 조선정종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으나,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하여 집현전을 채웠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주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試官)사관(史官)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그들의 직무는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왕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하였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러한 인적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작업으로서, 이를 위하여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관심은 개국초부터 있어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으며, 그 중심이 된 기관도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 등이었다.

이러한 기관에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와 사서(士庶)의 유교적 의례인 사례(四禮: 冠禮‧婚禮‧喪禮‧祭禮) 등 유교적인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정리된 의례‧제도의 틀은 중국의 옛 제도에 의한 것이었으나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비판, 연구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4. 편찬사업의 융성
세종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하여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또, 이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것이었다.

즉,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정리하는 사업이었고, 이 작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5.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다.

세종집현전을 통하여 길러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던 것이니, 이 시대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서적의 편찬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하여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1432년(세종 14)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길이 약 9.1m, 넓이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1434년(세종 16)에 준공되었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1438년(세종 20)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1433년(세종 15)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같은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하여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하였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하여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하여 1434년(세종 16)에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장영실에 의하여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1433년(세종 15)에는 정인지정초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1442년(세종 24)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이순지김담에 의하여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1445년(세종 27)에는 이순지에 의하여 『제가역상집』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역법의 총정리작업과 천문의상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 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1431년(세종 13)과 1446년(세종 28)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뒤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 있어서도 세종대는 특기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1434년(세종 16)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하여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1434년(세종 16)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蕆)의 감독하에 이루어져 20여만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고, 그뒤 1436년(세종 18)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鞘)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 있어서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1444년(세종 26)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하여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편찬, 간행된 『총통등록(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사시찬요(四時纂要)』 등과 우리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하여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하였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 있어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하여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하여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여,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하였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고,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하여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발상(發祥)」‧「봉래의(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악(與民樂)도 「봉래의」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과 「보태평」은 현재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하였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하여 향악인 「정대업」‧「보태평」‧「봉래의」‧「봉황음(鳳凰吟)」‧「만전춘(滿殿春)」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법치주의가 강화, 정비된 시기였다.
7. 법전의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1433년(세종 15)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1435년(세종 17)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1439년(세종 21)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1448년(세종 30)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1430년(세종 12)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1444년(세종 26)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와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기의 제조‧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에 대하여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으나, 세종 8년에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1443년(세종 25)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8. 불교에 대한 시책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구병(救病)‧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하여 국가에 귀속시켰고,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양종으로 병합하였으며, 사사(寺社)‧사사전‧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즉, 선교 양종에 각 18사(寺)합 36사를 본사로 인정하고, 사원전은 7,760결(結), 상주승 3,600인으로 삭감, 정리되었다.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都城)안에서의 경행(經行)도 파하였고, 궐내의 연등행사도 없앴으며, 여항(閭巷)에서의 연등도 승사(僧舍)이외에서는 일체 금하였다.

이처럼 세종의 불교에 대한 시책은 불교의 세속권의 정리‧약화와 불교행사의 제한으로 나타났으나 왕실과 세종 개인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의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1435년(세종 17)부터 1442년(세종 24)까지는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석탑(石塔)의 중수, 안거회(安居會)‧경찬회(慶讚會)의 설행(設行)을 둘러싸고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또, 1446년(세종 28)에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왕은 유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경(佛經)의 금서(金書)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였으며, 1448년(세종 30)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말년에 오면서 크게 변하는데 1444년(세종 26)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세종 27)에 평원대군(平原大君), 1446년(세종 28)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이 그가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는데 이와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유불(儒佛)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정치‧유교사회의 기반이 다져진 시대였다.

이밖에도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사업 등을 폈고,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함으로써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한 사실 등도 기억해야 될 일이다.
9. 평가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문종, 제2자는 세조이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璿源系譜
國朝寶鑑
增補文獻備考
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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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音廳始末(金東旭, 人文社會科學 5, 서울大論文集, 1957)
世宗의 言語政策에 관한 硏究―特히 韻書編纂과 訓民正音制定과의 關係를 中心으로 하여―(李崇寧, 亞細亞硏究 1―2, 1958)
世宗朝에 있어서의 對佛敎施策(韓㳓劤, 震檀學報 25‧26‧27합병호,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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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靑銅活字印刷技術發展의 技術史的 背景(全相運, 誠信女師大論文集 3, 1970)
朝鮮初期祀典의 成立에 對하여(金泰永, 歷史學報 58, 1973)
朝鮮王朝의 政治經濟基盤(韓永愚,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兩班儒敎政治의 進展(崔承熙, 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4)
經國大典의 編纂과 頒行(朴秉濠,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倭人關係(李鉉淙,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한글의 創製(李基文,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科學技術의 發達(全相運,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音樂(李惠求,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朝鮮初期議政府硏究 上‧下(韓忠熙, 韓國史硏究 31‧32, 1980‧1981)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묘호 : "세종(世宗)"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建相麻田祀太祖惠宗成宗顯文宗元宗忠烈王恭愍王世宗乙巳改以祀太祖顯宗文宗元宗文宗辛未賜號崇義殿
國朝編年v01太祖有八駿曰橫雲鶻女眞産遊麒靑咸興追風鳥女眞發電赭安邊龍騰紫端川凝霜白濟州回軍時御獅子江華黃玄豹咸興世宗命護軍安堅圖其形集賢殿諸臣製其贊以傳後○太祖素重經術以家門未有業儒者令太宗就學辛禑時太宗登第太祖拜謝
國朝編年v02聚僧徒誦般若經鳴螺執幡蓋香火前導巡行街巷以禳疾厄二品以上受命行香謂之經行至是命罷之我朝禮樂法度大抵皆世宗所剏實我東方之聖主也經行雖命罷但都中立圓覽寺好佛一事未免爲白玉之瑕鵞城雜紀○五月初十日太上王昇遐○臨
國朝編年v04聞莫不悲感興懷上又以璿源殿舊案只記奉審節目命考次序始末悉追記之太宗以上歲月旣久不可更考但錄其畵㨾數自世宗以後乃得詳錄以進賜名永慕錄謄寫藏之將以傳後命臣叔舟識其事保閒齋申叔丹集○設科取安良生等三十三人○鷹坊
國朝編年v05位諸朝矣然則昭陵復不可宥乎縱殿下明察其冤而欲復之議者必以爲彰祖宗之過而沮之是大不然殿下斷然復之則將與世宗比德而無忝於文宗矣何者太祖盡誅王氏太宗先誅鄭夢周以私觀之夢周謀害祖宗乃子孫之大憝而世宗錄用其後以奬其
國朝編年v06其沿海無置鎭防守之事也自我太祖開國之後於海港要害處皆置萬戶營以水軍處置使鎭之由是倭寇稍息其後倭復作梗世宗命三軍征對馬島雖不得大捷而倭亦畏威不敢肆有倭數戶欲㞐三浦世宗嘉其慕義而許之許稠泣諫曰倭奴狡詐特甚乍臣
國朝編年v07辛巳十六年三月武宗皇帝崩世宗立改元嘉靖○六月魯山君夫人宋氏卒年八十二命禮曹喪禮依大君夫人例葬于楊州墓在於魯山君甥姪海平府院君鄭眉
國朝編年v08爲愈也上答曰此事孰不知之且引災變反以加罪爲非予甚寒心災變若出於罪後則猶可說此災之出已久矣恐有姦人而然世宗朝昭憲后父亦被重罪若有罪焉則不可以至親貸之朝廷如此國事尤誤予意寒焉○權忠定初與順朋分深順朋初告尹時病
國朝編年v09修繕國家於宗廟之外別立文昭殿于景福宮之東隅延春門之內爲寢殿自西而東以奉太廟及四親神主以事生之禮事焉此世宗所定也後成宗追崇德宗而以德宗與睿宗爲兄弟不可幷入文昭殿別立延恩殿於神武門之內以文昭殿之禮祀焉乙巳仁宗
國朝編年v11皇賜皇子貞紙姓源源氏之提政始此仍爲世襲其來已久懲怨錄曰源氏立國於洪武初其誤也○初我國亦嘗遣使修慶吊禮世宗朝申叔舟以書狀官往來卽其一也後叔舟臨卒成宗問所欲言叔舟對曰願國家毋與日本失和成宗是其言命副提學李亨元
國朝編年v16丙午三十九年大明萬曆三十四年春封大君名㼁號永昌領議政柳永慶引世宗朝臨瀛大君璆廣平大君璵故事率百官陳賀○撫院差原任游擊劉興漢到我國邊上偵探倭情勿論緩急不時飛報○奴忽二
國朝編年v17再佑請尊大妃不報○進士李偉卿幼學黃德符連疏醜詆大妃力請廢黜冬特命復鄭造尹訒官爵使侍經幄○欽敬關初創於世宗朝甲寅而在景福宮康寧殿側中遇火燒明廟朝甲寅再創於舊基又値兵燹至光海甲寅改創於昌德宮瑞麟門內自始至今三
國朝編年v19乙丑三年世宗朝始爲文昭殿倣漢原廟之儀兩時上食一時茶禮饌用素品至於各陵及廟有朔望祭亦幾於瀆矣議者多以爲言而未敢釐革
國朝編年v20高祖不爲云者全無高曾祖父代數而言柳景緝佯若不知援引不近之古說又以爲自前有例云是自欺其心又欺其君也太宗世宗以功烈世祀故不稱高祖而只稱曾孫云者是亦遁辭也承旨徒知營護臺官而不念告君以實之義良可惜也以如此之事觀之
國朝彙鑑v1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諱裪字元正洪武丁丑四月十日壬辰誕降于漢陽潛邸在位三十二年景泰庚午二月十七日壬
紀年便攷v1守節諸臣第五本朝太祖紀事配享相臣列傳定宗紀事配享相臣列傳第六太宗紀事配享相臣文衡列傳第七世宗紀事第八世宗配享相臣文衡湖堂列傳第九文宗紀事配享相臣湖堂列傳端宗紀事相臣湖堂節臣第十世祖紀事第十一世祖配享相臣文
紀年便攷v1列傳第四高麗守節諸臣第五本朝太祖紀事配享相臣列傳定宗紀事配享相臣列傳第六太宗紀事配享相臣文衡列傳第七世宗紀事第八世宗配享相臣文衡湖堂列傳第九文宗紀事配享相臣湖堂列傳端宗紀事相臣湖堂節臣第十世祖紀事第十一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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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年便攷v2興生 嗣宗廷老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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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年便攷v2綱地 紀地 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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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年便攷v3一日誕降 太祖元年封靖寧翁主定宗二年册封貞嬪尋進封靜妃戊戌上尊號庚子七月十日昇遐誕四男四女獻陵同原嗣世宗大王 序居第三一男讓寧大君褆娶光州金氏光山君贈左議政漢老女二男孝寧大君補娶海州鄭氏賛成贈左議政易女四
紀年便攷v5子孫世居三歧村其数甚多太宗丁亥卒年六十六賜祭文曰運佐時之奇畧樹盖世之㓛勳鍚之以分茅胙土褒之以峻秩崇班世宗朝命立廟使中軍揔制申樯題其額曰林氏家廟殁在革除後十六年而末職非 本朝之制其間自守其身足可徵歟子穆興穆
紀年便攷v5壺村金冲漢婿與我太宗同榜進士退居南原壺村麗末崇佛包翅獨爲性理之學善書法及竹橋水赤松嶺葉黃痛哭入山自靖世宗徵拜大司諌不就父子并院享子檣見下
紀年便攷v5趙瑜元吉子字俞玉號䖍谷麗末登科官止副正本 朝以官徵之不就麗俗短䘮瑜與鄭夢周断然行三年之制世宗嘉之表其閭曰孝子副正趙某之門書麗官者成其志也親䘮負土築塋六年廬墓事在三綱行實子崇文見下玄孫義貞尙中宗
紀年便攷v5其親戚門生七十餘人原頫視不義而富貴者猶草芥也甞上䟽斥佛尤習古禮皇甫仁於經席屡達特降昭雪太宗朝贈左賛成世宗命朴彭年撰雪冤記贈諡文節立祠順天五世孫軾見下
紀年便攷v6一曰治典吏典二曰敎典戶典三曰禮典四曰政典兵典五曰刑典六曰事典工典命河崙更為詳定名曰經國六典有元集續集世宗朝六典謄錄仿二典世祖朝折哀六典著為經國大典成宗朝有續錄中宗朝有續錄 肅宗朝有輯錄通攷巽祖朝有續大典
紀年便攷v6第三子世宗
紀年便攷v6道傳南誾世子芳碩遂及焉則芳蕃亦不免時年十八初謚恭順改章憲太祖悼念二殤屡幸僧舍供佛以資冥福太宗追舉恤典世宗以廣平大君璵為后加贈楸城君顯宗朝復貞陵位號後追加大君號
紀年便攷v6目大無光膽小人也徃必奔北果然戊寅為左相芳碩與長子原之来赴李茂曰此亦芳碩等黨命斬之并殺原之降曼殊為貳相世宗元年復官孫洙見下原之孫自湄見下玄孫洵見下
紀年便攷v6林府院君官止崇祿左賛成謚齊肅玄孫璫見下六世孫偉見下八世孫聲振下見孫從舜大卿季誠子李貞榦外孫號西湖歴事世宗文宗端宗世祖 睿宗成宗官止判尹選清白吏謚恭胡
紀年便攷v6討平耽羅太祖卽位屡徵至兵判世宗徵以都㧾制皆不就
紀年便攷v6疾不徃欲除人官爵則書名於小簡伻人奏之親朋布列膴仕起甲第於敦義門內恶聞人馬之聲奏塞門禁人遂得罪杖流咸陽世宗朝撰龍飛御天歌叔蕃以詳知 先朝時事馹召之撰訖命還送貶所曰得罪先朝予不得擅用也官止賛成府院君母南氏前夫
紀年便攷v6未與廉致謹以奴婢事不忠之言到䖏掦言下禁府百官立庭請無恤無悔等罪三省交㘴問無悔無悔謀翦除宗支之罪與告于世宗之言無恤等付䖏清州尋并賜死妻子遠方安置霽女三人 元敬王后平原君趙礏右相盧閈
紀年便攷v6柳廷顯文化人文化伯鎭子鄭䫨婿恭愍王乙未生字汝明號月亭麗朝蔭仕入我朝太宗丙申入相至領致仕世宗上壽于 上王廷顯以領敦寧入侍 上王賜虎皮曰壽如皮之靭長也仍以玉杯同飮廷顯固辭 上王曰勿辭也丁未卒年七
紀年便攷v6代人臣言行可戒可法者著政府相䂓說但性吝割冬苽必署之對客飮酒酌其盞数謹封壺壜而蔵之甞在德興寺撰國朝寳鑑世宗重其文章賜饌絡繹宰樞爭送酒食貯房內日久生虫蛆臭達墻屋腐則棄丘壑僕從未霑一瀝雖微物不借於人官止賛成謚文
紀年便攷v6立碑記之 太宗戊戌以兵判有所失以 上王命鞫問被斬亞堂姜尚仁車裂領相沈溫辭連押送水原使之自盡習年五十二世宗朝伸雪子義孫同禍玄孫世茂見下
紀年便攷v6其行徵以仕每不肓就晩起為嘉善都觀察使為親屈也早懸車退居清州松州年八十養百歲母不離側怡愉弄雀雛為老萊戱世宗嘉之降褒書超官秩為資憲中樞院事特賜几杖致仕以御筆書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以賜仍賜慶壽宴一時賢士大夫爭為
紀年便攷v7開素在政府二十七年務遵祖宗成憲不喜紛更處事循理--䂓模遠大鎮物之量得大臣軆身致太平經綸器局爲我朝之最世宗每擬以蓍龜權衡勲業徳望比宋之王文正韓忠獻云爲相工判金宗瑞會于公處宗瑞令工曹畧具酒果以呈喜怒曰國家設禮
紀年便攷v7九子五女亭在臨津江下名曰伴鷗子孫結廬仍名伴鷗文宗壬申卒年九十及卒吏胥僕隷并来祭謚翼成卒之五日特命配享世宗廟庭子守身見下六世孫廷彧見下玄孫孟獻汝獻孝獻見下曾孫坦武科中宗朝䇿國㓛三䓁追封長原君曾孫進見下
紀年便攷v7及到恩威并行毛麟衛都督李㪚滿答失里建州衛都指揮李㪚滿各遣子姪而納降邊境安靜出入將相清德見稱謚貞烈配享世宗廟庭
紀年便攷v7不知隂陽之事稠笑曰若不知隂陽之事詡訥従何而生每遇親忌必服其母手縫衣以致齋端宗甲戌卒年八十六謚文敬配享世宗廟庭子詡見下
紀年便攷v7祖止之嘗書言忠信行篤敬小心翼翼對越上帝十四字示三子曰士君子之心當以此爲的世宗丙寅卒年七十三謚文僖配享世宗廟庭曾孫鏛見下命和命仁見下七世孫碩蕃見下九世孫厚載見下弟曉號西湖又晩窓太宗壬午以生員魁文科以正言言事
紀年便攷v7養拙堂恭讓王庚午十七生進俱中我太祖癸酉二十登春塲試歴翰林銓郞舍人大提學世宗己未入相至左入耆社賜几杖佐世宗致太平亦有文章性剛直屡抗章太宗甞曰㮣有諫臣風窓壁間有畫墁長者聚羣兒詰之羣兒争辨㮣方三歲獨不言指身長長
紀年便攷v7李随鳯山人字随卿號深隐又寅荅㳟愍王甲寅生太祖丙子生壯始補太廟郞官太宗甲午以直長登親試世宗有甘盤之舊及即位㩴用官止吏判藝文館大提學有文名庚戌卒年五十七謚文靖配享世宗廟庭
紀年便攷v7廟郞官太宗甲午以直長登親試世宗有甘盤之舊及即位㩴用官止吏判藝文館大提學有文名庚戌卒年五十七謚文靖配享世宗廟庭
紀年便攷v7還過曲阜謁孔子廟戊戌降封爲讓寧大君放于廣州天姿倜儻平生自奉甚厚蜼失徳廢嗣晩年能随時自晦自少能文章而見世宗有聖德陽若不知書者上亦未知其有文也晩歲題僧軸曰山霞朝作飯蘿月夜爲燈獨宿孤巖下惟存塔一層雖號爲文人者未
紀年便攷v7舉兵而叛将欲挾魯山以危 宗社罪恶貫盈天地之所不容断以大義明正典形壬午卒年六十九謚剛靖 太皇帝乙丑配享世宗廟庭七世孫齊杜見下十六世孫承輔見下
紀年便攷v7日皷皮盡鬆俗稱物之柔而有力者曰孝寧大君皷皮云晦迹方外歴事九朝成宗丙午卒年九十一謚靖孝 太皇帝乙丑追配世宗廟庭七世孫曙見下六世孫慎誠見下八世孫有養見下六世孫箕賓見下七世孫滌見下五世孫棵見下六世孫重繼見下十二
紀年便攷v7容軒受學於姊夫権近辛禑壬戌十五進士乙丑十八文科鄭夢周主試歎曰文敬岡不亾太宗朝䇿佐命㓛四等封鐵城府院君世宗即位戊戌入相至左選清白吏姿相魁偉器宇寬弘朝京 帝竒之曰黄鬚宰相後須復来為首相九年政務寬大不喜更張有忌
紀年便攷v7巳卒年八十上率百官白衣臨吊謚文簡六世孫夢翼夢井見下七世孫公亮見下子季聞字叔行生進文科以父名觀辭觀察使世宗命改以寬官止吏兵判謚安肅七世孫>見下季聞玄孫希律䕃僉正塢子壬辰立節贈兵参希律再従夢鶴以壎子為従叔均后
紀年便攷v7凡兒太宗辛卯十六生員甲午十九文壮河崙觀䇿知其為公輔之器世宗丁未以殿直魁重試即拜集賢直提學典文衡太宗謂世宗曰文有鄭麟趾武有洪師錫堪任将相王無憂矣端宗癸酉入相至領䇿靖難㓛一等封河東府院君靖難日所着襦衣血汗滿裏
紀年便攷v7作趾窺魚蘆渚㡬多時未及作落句翻示後而乃墨鷺圖也應聲曰偶然飛遇山隂墅誤落羲之洗硯池其敏給如此在集賢殿被世宗殊遇文宗與之為布衣交世祖受禪以禮房豕㫖抱國壐痛哭世祖方俯伏謙譲舉頭諦視之及莊陵廢朴彭年欲墜慶會楼也三
紀年便攷v7溪又延鳯生長於善山府底置一小齋與兄弟共䖏世宗乙卯生員戊午魁明經科壬戌選湖堂入集賢殿至提學為八文章之一世宗朝人才最盛而緯地為第一官止禮參 天順皇帝䧟虜中緯地感慨曰天子蒙塵天下共憤雖海東陪臣豈可恬然每䖏外廊朴
紀年便攷v7甞恨家無書籍及入集賢到藏書閣閉戶端坐歴覧無遺金宗瑞開拓六鎮時以叔舟為従事宗瑞曰我固自負君之才亦大難也世宗御製諺文子母二十八字設局禁中以叔舟為撰定使臣質問于中華黄璿徃還遼東璿以罪方謫遼東凡十三度文宗疾甚召集
紀年便攷v7廣平大君璵世宗第五子為撫安大君后字煥之號明誠堂八嵗封爵善於詞藻善彎弓撃毬音律数學亦極其工世宗甲子卒年二十謚章懿子永
紀年便攷v7金漸清道人仲龍七世孫潾子號義村 太祖壬申文科歴舎人箕伯歴事 四朝官止左參䝺世宗御便殿視事漸以參䝺進曰殿下為政當一遵今皇帝法度禮判許禂進曰有可法者有不可法者漸曰臣見帝親引罪囚詳加審
紀年便攷v7己巳生壮 太祖癸酉春塲試太宗丁亥以成均直講登重試即拜敬承府尹歴大司成官止嘉善仁壽府尹經明行修為世師儒世宗朝與金鉤金泮金末共掌成均教人
紀年便攷v7金末義城人定宗己卯生太宗丁酉十九明經科與金鉤金泮同被尹祥。選爲甞監与祥泮經㫖頗有異同不相上下世宗朝掌教人多年成就人才博通經史尢邃性理之學 成宗甲寅卒年八十六有一女無子甞曰聞開千眼者得隂報余自筮仕以
紀年便攷v7五經然後令讀通鑑諸史百家以及射御書数之藝教之有法度世宗命舉經明行修堪為師儒者叔滋為首薦甞為開寧縣監遭世宗䘮衰絰向闕哀臨又遭文宗䘮悲泣尢㘦曰嗟嗟乎嗣君覩者為之感動世祖元年辭職歸宻陽丙子卒年六十八以有妻娶妻見
紀年便攷v7童蒙須知㓜學子說正俗篇皆誦然後令入小學次孝經次四書五經然後令讀通鑑諸史百家以及射御書数之藝教之有法度世宗命舉經明行修堪為師儒者叔滋為首薦甞為開寧縣監遭世宗䘮衰絰向闕哀臨又遭文宗䘮悲泣尢㘦曰嗟嗟乎嗣君覩者為
紀年便攷v7朴堧宻陽人天錫子辛禑戊午生字坦夫號蘭溪初名然本永同儒生也太宗辛卯以生員登科歴藝提官止資憲中樞院使為世宗朝名臣孝行出天其居廬也山君来衛坐苫之側雉免馴遊堦庭之間事聞旌閭善暁音律世宗制楽堧實主之其子與於癸酉之
紀年便攷v7科歴藝提官止資憲中樞院使為世宗朝名臣孝行出天其居廬也山君来衛坐苫之側雉免馴遊堦庭之間事聞旌閭善暁音律世宗制楽堧實主之其子與於癸酉之難堧亦固是罷還致仕入耆社謚文獻永同有書院従弟興生字敬夫號菊堂金自粹門人自粹
紀年便攷v7辛引孫靈山人有定子辛禑甲子生字祚胤號石泉初名安住太宗壬午十九生貟戊子文科歴翰林銓郞叅掌機宻世宗倚重官止兵判大提學以文章名世筆法傳海東及卒上特送御札蘭竹屏設靈几前謚恭肅子碩祖見湖堂六世孫啓榮見下
紀年便攷v7金墩安東人文科世宗命墩與金銚建小閣內設玉漏機輪以水激之凡百機關不由人力自撃自行若神使然天曰之度晷漏之刻與天行不差毫釐又
紀年便攷v7安崇善純子字仲止號瓮齋太宗辛卯進士世宗庚子以前監察魁文科文詞流麗遭遇世宗言聼計従時称名臣性豪俊自恃才學甞為同副承㫖命到院遂就都承㫖之坐曰可㘴此座矣左承㫖金宗瑞色缺如灰歴藝文
紀年便攷v7胗校理登重試歴東伯選清白吏官止集賢殿副提學經學精邃啓沃甚優論道弼違蔚為盛世名臣性喜飮以副學或因醉入對世宗戒之曰以三爵為限鑄賜銀杯萬理曰不可以私子孫冝蔵本館以表洪休孫世傑見下玄孫汝舟武都正瓊子字巨川號三節堂
紀年便攷v7號翫易齋李行門人有孝行生高亢一舉不中竟不赴舉以學行進歴執義承㫖大司憲天性豪邁精白慷慨百家之書無不通究世宗知其有學行特命知禮曹事修五禮凡吉㐫大事一以委之委之常戒子希顔希孟曰人之冨貴榮達在天非求之可得所可盡者
紀年便攷v7朴弘文世宗時知泰安郡事郡經麗季兵燹没為荒墟流民稍集他邑民亦樂歸弘文曰郡民僅為三百餘而出賦稅奉期約者太半覊寓今既
紀年便攷v7時方嚴沍廉就淵呼泣鑿氷求之忽有水蛭数三附手指持以吮癕父病即愈官止判事享年九十五世宗命旌其閭姜尚仁戊戌世宗受禪太宗為上王兵曹有失火事不禀 大朝命鞫入直兵曹叅判姜尚仁及判書朴習參議李懿正郞佐郞䓁皆下獄車裂尚仁
紀年便攷v7患癕疽醫云水蛭吮血可治時方嚴沍廉就淵呼泣鑿氷求之忽有水蛭数三附手指持以吮癕父病即愈官止判事享年九十五世宗命旌其閭姜尚仁戊戌世宗受禪太宗為上王兵曹有失火事不禀 大朝命鞫入直兵曹叅判姜尚仁及判書朴習參議李懿正
紀年便攷v7李季甸韓山人種善子太宗甲申生字屏甫號存養齋世宗丁未以宗廟副承登親試屡為抗疏每進封章世宗曰季甸之疏又来矣端宗朝策靖難㓛一䓁封韓城府院君世祖朝策佐翼㓛二䓁官止領中樞其姪塏為端宗立節而季甸為世
紀年便攷v7句卽上所製雪裡梅花詩曰却於氷雪崢嵘童偸得春風漏泄香友愛甚篤以永膺大君世宗所鍾愛四時衣服皆令尚衣院製給世宗嘗欲以內帑珍寳盡賜永膺未果而薨上卽位傾帑賜之於是御府世傳之寳盡歸
紀年便攷v7年十二歲領議政皇甫仁左議政南智右議政金宗瑞䓁受顧命輔佐集賢學士成三問朴彭年申叔舟李塏河緯地柳誠源䓁受世宗付託左右協賛
紀年便攷v7至三問驚惶顚倒出拜聖學之勤好士之篤誠千古所罕聞性至孝庶務叢劇而嘗葯視膳必身親之夜分侍側不命之退不敢退世宗嗜櫻桃上於後苑手栽候節以進上王昇遐上悲泣不自勝居廬水漿不入口時方患疽瘡口未合大臣請退居溫室終不許命朝
紀年便攷v7傳千紅萬紫闘春風春盡都無一點紅之句卽上所製雪裡梅花詩曰却於氷雪崢嵘童偸得春風漏泄香友愛甚篤以永膺大君世宗所鍾愛四時衣服皆令尚衣院製給世宗嘗欲以內帑珍寳盡賜永膺未果而薨上卽位傾帑賜之於是御府世傳之寳盡歸
紀年便攷v7世宗朝相臣
紀年便攷v7大事確不可犯立朝四十年不被彈駁為文工於四六一時表箋皆出其手文章如大河長江称為大手自登第至台輔常兼舘閣世宗甞曰寧城眞寸也成宗甲午具冠服將赴公會得疾不救年六十六謚文靖曾孫興源見下子永隣徐居正婿字泉明號石圃世祖
紀年便攷v7疏曰運祚脩短皆係天命人心之去留無關於地理今上有神明試用其說末流之弊不可救上以其論為正直遂不用賢老之言世宗言於鄭麟趾曰孝瞻之論然矣父母之葬能不用此法乎麟趾曰臣甞奉使到咸安晃孝瞻葬父於家園似非惑於地理者其後葬
紀年便攷v7在永濡下金漢慶州人奉禮自恭子自粹從侄初名檏号愚齊世宗朝文科端宗癸酉棄官遯于藍浦乙亥闻上遜位登山齊哭枉易中酒傷盡成疾以終官止監察當載端節
紀年便攷v7世宗令集賢儒臣撰歴代兵要首陽大君為総裁官其書至是成大君啓請加資級酬其劳成三問柳誠源䓁皆受賞資河緯地力辭不
紀年便攷v7澄玉嘗守會寧開拓六鎭頗有㓛及為咸吉道節制使世宗宻諭曰非國有大事不爾召也靖難後宻遣朴好問輕騎疾代澄玉行一日忽曰節制重任匿聲来代何也還至撃殺好問舉兵叛
紀年便攷v7世宗遺志也
紀年便攷v7世宗一子
紀年便攷v7世宗第六子
紀年便攷v7上每月三次親問起居于上王上王臨紫薇堂見牎欄太息曰此世宗所御䖏也若世宗在世吾之見愛豈其少乎仍泫然泣下
紀年便攷v7上每月三次親問起居于上王上王臨紫薇堂見牎欄太息曰此世宗所御䖏也若世宗在世吾之見愛豈其少乎仍泫然泣下
紀年便攷v7世宗朝文衡
紀年便攷v7韓確清州人康六世孫郡守永矴子定宗庚辰生洪汝方婿字子柔十九 帝占授光祿寺少卿世宗即位 帝以確為降冊正使後還國端宗癸酉入相至左策靖難㓛一等封西原府院君為德宗國舅二妹俱膺 皇朝之選仁宗
紀年便攷v7字清之號匪懈堂又琅玕居士又梅竹軒博洽經史兼通內典筆法與子昂並肩為東方第一甞題崇禮門額名入筆苑亦以詩名世宗名其堂曰匪懈華使見其筆曰當今天下善書者陳學士某為最而若比此則不及遠矣後尹太監奉詔来以大君筆歸獻 帝覧
紀年便攷v7安平大君瑢世宗第三子太宗戊戌生字清之號匪懈堂又琅玕居士又梅竹軒博洽經史兼通內典筆法與子昂並肩為東方第一甞題崇禮門額
紀年便攷v7臨瀛大君璆世宗第四子庚子生南智婿崔士康孫婿后字獻之號白雲居士 端宗遜位後衣麻衣戴平凉子登高岡每日望闕禮雨雪不廢人皆
紀年便攷v7錦城大君瑜世宗第六子丁未生崔士康婿德器清高亂氣灑然無一點塵累好學尤長於詩文書法奇絶為天下第一又善畵圖琴瑟之技性好右
紀年便攷v7和義君瓔世宗一子令嬪姜氏出朴仲孫婿字良之㓜有異質稍長善屬文甞自書曰人生斯世忠孝為大忠能保國孝能匡世其志所存如此端
紀年便攷v7孝源啓曰右相似有採薪之憂不發言世祖又令復徃且曰楊嬪亦囑以宜早納妃不可不從孝源又徃告以此麟趾怒曰楊氏雖世宗封為嬪固是賤女豈知國家事乎
紀年便攷v7漢南君王+於世宗王子惠嬪楊氏出楊氏以進乳於端宗乙亥被禍一云丁丑被禍後伸謚貞悼初端宗冊妃時世祖使舍人黃孝源徃告于右相鄭
紀年便攷v7世宗朝相臣
紀年便攷v7世宗朝湖堂
紀年便攷v7世宗朝湖堂
紀年便攷v7世宗朝湖堂
紀年便攷v7世宗朝湖堂
紀年便攷v7曰無雨雷聲何䖏動黃雲片片四方分五歲許稠訪之曰吾老矣以老字作句乃應聲曰老木開花心不老許撃節曰此所謂神童世宗命招于政院知申事朴以昌試之曰童子之學白鶴舞青空之末時習對曰聖主之德青龍飜碧海之中上曰予欲親見恐駭人聽
紀年便攷v7許詡稠子世宗丙午以前副令登科丙辰以直學登重試官止左參賛家世忠孝丧父哀毀事母色養仕世宗二十餘年謹身守口拜承宣也人皆来賀其父獨有憂色終夜不寐曰天道滿招損我無㓛德位極人臣子又承宣許氏之禍無日
紀年便攷v7李穰義安大君孫完川君謚齊懿淑子登武科以世宗守陵官躐陞正一品官止右賛成端宗癸酉與三相臣殉節一門十六人同禍肅宗戊寅并伸雪 英宗辛亥配食 莊陵忠臣上
紀年便攷v7大小順逆之義太祖旋師開國後授順天府使盖以前日之言順乎天理也與鄭苯成三問交善夢周忌日齋沐為位哭終身不廢世宗以司諌徵端宗以承旨徵皆不起丁丑端宗昇遐入山痛哭北向四拜遂仰藥而絶年八十六
紀年便攷v7死于固城謫所正祖朝享三相祠公州蓼塘辛亥追錄死事諸臣設壇於莊陵而并享純祖辛卯贈吏參弘提子銘字警之號仁村世宗朝年十六登文科官止兵曺正郞以文學称為兵郞時曺失軍簿郞吏皆駥懼莫知所為銘從容口呼遂完其籍既而得所失簿較
紀年便攷v7宋侃礪山人良珍子事世宗文宗逮端宗朝秩至嘉善乙亥巡撫南方既畢將還聞國家內禪馳向寧越反命子清陰浦辭出哭失聲守者欲收之有一老吏私
紀年便攷v7鄭弘德慶州人正言仁良子號八松世宗朝文科官止兵判賓客端宗甲戌以上使如京行兵部尚書乙亥還朝時世祖已受禪直詣端宗所在幽宮奏事與六臣相向而泣
紀年便攷v7金孟權光州人監察仲老子號晩翠堂早擢蓮榜名重賢關世宗選置二十人孟權與焉屡賜召對膝置端宗顧謂孟權曰汝於他日善輔此兒及世祖受禪即日徒步還郷絡身不赴舉保寧俗陋
紀年便攷v7奇處幸州人典書勉子號眩菴又青坡天資英發學業精粹世宗朝以布衣擢拜持平出宰延安濟州歴大司憲箕伯官止判中樞家在青坡常徒步徃来泮宮必誦中庸大學婦女出入時盖頭自
紀年便攷v7尹譓南原人監司臨之孫世宗朝文科官止吏佐世祖受禪棄官入山女適權完完之女為端宗媵御完之死譓絜家歸長城杜門不出臨終書忠孝二字付叔父
紀年便攷v7牟晌一云恂弘農人典書時靈子鄭夢周門人太宗丁酉以生員登明經科世宗朝陞左司諌尚風節不肯俛仰随俗退居于郷當 魯山遜位守正不撓放逐于三嘉憂憤而卒後人称其井曰孝子井指其宅曰
紀年便攷v7曾孫蔭仕贈戶判謚良惠石雋子字潤夫號忘世亭端宗丙子以後不復仕世祖屡召不起官止坼伯致仕孫光彥見下子安義尚世宗貞安翁主青城尉
紀年便攷v7安桑鷄孟聃子世宗外孫世宗錫名曰桑鷄號田隐以王室至親不立於世祖之朝屏居楮子島與金宗直南孝溫相唱酬與従弟應世同志宗直文集中有田隐
紀年便攷v7安桑鷄孟聃子世宗外孫世宗錫名曰桑鷄號田隐以王室至親不立於世祖之朝屏居楮子島與金宗直南孝溫相唱酬與従弟應世同志宗直文集
紀年便攷v8世宗子韓確婿
紀年便攷v8上謂鄭麟趾曰觀此則祖宗創業之艱世宗制作之義可知麟趾對曰正是逸中思劳安中思危之時也上稱善曰宜令諸生賦詩以毋忘今日
紀年便攷v8世宗王子
紀年便攷v8天太祖㝎都漢陽仿前朝制築圜丘於南郊太宗卽位因政府言以為非天子不得祭天遂罷圜丘之祀復因卞季良言復祀以及世宗初年猶禱雨於圜丘然議者終以為不便罷不舉者有年至是上深納梁誠之疏中郊天享帝之語决意配國丘命有司具儀註上
紀年便攷v8祖太宗世宗文宗四祖治法政謨為書七篇凢一期乃成上覧而善之賜叔舟䓁鞍具馬
紀年便攷v8傍家啓門出溲小橋側仰觀星文自語曰紫微星經柳星可恠也良久還入三角山石路危險上步履如飛瞬息上下常衣濶袖衣世宗曰如汝有勇之人衣服寬大可也以謝恩使赴京道路見者必稱大将軍皇城闕門外八象見之一時退縮人異之性儉甞入內殿
紀年便攷v8世宗朝湖堂
紀年便攷v8宰相父尹平壤時宴中詔使黃儼于賔舘守慎兒時在稠人中儼指之曰此誰家千里駒耶生子當如是可善教之後日當成偉器世宗朝以門䕃特授宗廟副丞歴持平掌令承旨禮判世祖朝䇿佐翼㓛三等封南原府院君甲申入相至領甞赴試為試官所辱發憤
紀年便攷v8申叔舟三九見世宗朝湖堂
紀年便攷v8桂陽君璔世宗二男慎嬪金氏出韓確婿世祖朝䇿佐翼元㓛謚忠昭九世孫徳英見下弟同母翼峴君璭䇿左翼㓛一等第二謚忠成
紀年便攷v8密城君琛世宗五男桂陽君同母弟 睿宗朝䇿翊戴㓛二等成宗朝䇿佐理㓛二等謚章孝子雲山君誡中宗朝䇿靖國㓛二等謚恭昭玄孫綏
紀年便攷v8江陽君橚以桂陽君子為叔父潭陽君璖后號雙松主人世宗賜號琴軒謚良悼妻金氏不知其先年七歲来泊濟州舟中有一琴一樽及資治通鑑世宗命養于宫中及長為江陽妻曾孫誠中
紀年便攷v8君子為叔父潭陽君璖后號雙松主人世宗賜號琴軒謚良悼妻金氏不知其先年七歲来泊濟州舟中有一琴一樽及資治通鑑世宗命養于宫中及長為江陽妻曾孫誠中敬中見下
紀年便攷v8永順君漙廣平大君璵子世宗甲子生字俊之號明新堂生六月而孤世宗命姆抱前親命小字曰壽福世祖常令在左右政院出納公事皆令主之與河城君鄭顯祖更日直宿純懿端慤聡明宏達雖崇貴
紀年便攷v8應之如響遂取妓籍五百人命元濬一見匿其籍使呼入無一遺者監司歎服乃治馹上言此人不易多得雖有罪不可棄願速召世宗命召以雲為題七步成詩乃呼韻應聲曰駘蕩三春後悠揚萬里雲凌風千丈直暎日五花文祥光凝王殿瑞氣擁金門待得従龍
紀年便攷v8任元濬豊川人司正肩子南乙珍孫婿字子深号四友堂聦明絶人有倚馬撃鉢之才且善筆法世宗朝謫密陽監司巡至試其文應之如響遂取妓籍五百人命元濬一見匿其籍使呼入無一遺者監司歎服乃治馹上言此人不易
紀年便攷v8安孟聃竹山人北伯望之子世宗乙未生戊申尙世宗貞懿公主封竹城君階止崇政甲子改官制凡駙馬改稱尉孟聃封延昌尉所以别宗室也善草書射御曉音律好浮屠世祖壬午
紀年便攷v8尹師路坤曾孫文參議垠子倬従叔權節妻男字果翁尙世宗貞顯翁主世祖朝䇿佐翼㓛一等封鈴川府院君拜左䝺成兼判吏曹心計精敏一毫不遺庚辰判廣州卒於治所謚忠景九世孫
紀年便攷v8初太祖命撰元六典續六典世宗朝又撰六典謄錄世祖以其科條有前後牴牾者命崔恒䓁斟酌損益改㝎六典纔託刑戶二典至是乃成上曰先王之志事也告
紀年便攷v9禮曺啓請依世宗世祖朝故事三月三日九月九日議政府六曺館閣堂上會于成均館課試儒生従之
紀年便攷v9世宗命許稠䓁旁採禮書兼用中朝諸司職掌洪武禮制東國古今詳㝎禮䓁書參酌撰㝎五禮世祖命姜希孟成任改修五禮中可施
紀年便攷v9継宋妻世宗孫女 上五寸親也郊祀還到第二橋猝向其第在梨峴継宋妻身着綿布黑衫手治女紅顚倒出迎叙盡情誼特命授継宋以掌
紀年便攷v9先是世宗命集賢殿學士賜暇讀書課製各軆及集賢殿罷賜暇之法亦廢至是 上命政府館閣堂上抄啓讀書文臣復撰勸奨事目因知
紀年便攷v9世宗朝至會禮酒三行 上發乘矢一獲宗親議政以下六十八人耦射獲者賞不獲者罰仍坼名取四人卽日放㮄國朝即日放㮄始
紀年便攷v9世宗朝湖堂
紀年便攷v9安繼宋瑗曾孫持平㩘子世宗王子桂陽 君璔婿字子胤號薄田耕叟性痴詩酒之外無留心䖏人知與不知皆称薄田而不愠成宗與繼宋妻為五寸親歴臨
紀年便攷v10云至誠子志性號佛頂山人又狂直子博子百家無所不通教授千人云裕孫八十後娶妻生志性壽八十餘志性子䝺亦八十自世宗以後二百七十年洪氏三世閱歴云
紀年便攷v10初世宗征對馬島降倭請居薺浦塩浦釜山浦䓁地世宗嘉其慕義許之是所謂三浦倭也後生齒漸繁頗肆驕傲邊將不能制釜山僉使李友曾欲以威脅之倭奴憤怨潜引對馬島兵船
紀年便攷v10世宗以藏義寺賜集賢諸臣令讀書其中 成宗移建於龍山名曰湖堂至昏朝廢之上
紀年便攷v10世宗征對馬島降倭請居薺浦塩浦釜山浦䓁地世宗嘉其慕義許之是所謂三浦倭也後生齒漸繁頗肆驕傲邊將不能制釜山僉使
紀年便攷v10大臣禮官難之故遂止他曰趙光祖言於上曰臣聞柳寬之卒也世宗哭聲徹於外今用漑之卒上欲舉哀而大臣以為無别殿可為云其不能將順甚矣 世宗於柳寬柳廷顯之卒禁川槁設幄次行
紀年便攷v10曰趙光祖言於上曰臣聞柳寬之卒也世宗哭聲徹於外今用漑之卒上欲舉哀而大臣以為無别殿可為云其不能將順甚矣 世宗於柳寬柳廷顯之卒禁川槁設幄次行之今禮官考例欠詳矣
紀年便攷v10世宗肅皇帝嘉靖元年
紀年便攷v11世宗
紀年便攷v13世宗第十八子愼嬪金氏出未及娶而世宗昇遐哀毀而卒謚夷哀世祖特命以母兄桂陽君增次子江陽君潚爲后桂陽君韓確婿謚忠昭江陽君號琴軒又雙松主人
紀年便攷v13世宗第十八子愼嬪金氏出未及娶而世宗昇遐哀毀而卒謚夷哀世祖特命以母兄桂陽君增次子江陽君潚爲后桂陽君韓確婿謚
紀年便攷v14世宗
紀年便攷v15領議政柳永慶援世宗朝臨瀛大君廣平大君故事率百官陳賀設增廣以固寵識者窃議而畏其勢莫敢言
紀年便攷v15世宗
紀年便攷v19世宗
紀年便攷v20先是禮曺啓言成宗定五禮之制述大典之文制作之盛侔於世宗深仁厚澤遂致太平誠宜廟食百世遵光武進尊宣帝之故事至是上議大臣始行之
紀年便攷v25初東方循用中朝所頒而未嘗自國中推策及世宗朝始立推策之法然其術數亦不出於大統曆法氣朔交食往往不合及仁祖二十二年觀象監提調金堉奉使入燕聞西洋人湯
紀年便攷v27再䟽批曰昨日批㫖訓戒之語爾其式克欽承母爾更辭又言尹宣舉父子䖏分事至是王世子出坐時敏堂聴政受百官朝叅依世宗朝例用人用兵刑人外庶務皆取世子裁决
紀年便攷v28世宗
紀年便攷v29李彥經寧海君瑭世宗子九世孫文佐郞廷麟子字士常號天遊齋肅宗辛未登謁聖歷春坊錦伯海伯官止大諫子春躋見下孫昌任見下従子弘躋蔭
紀年便攷v29世宗
紀年便攷v29世宗
紀年便攷v29世宗憲皇帝雍正元年
紀年便攷v30上曰昔漢文除肉刑我世宗除笞背此盛德事也○况壓膝無於律之律乎自今其永除之
紀年便攷v30世宗朝剏制宣祖壬辰灰燼李恒福講究舊制肅宗朝命李敏哲重修至是上以副鑄儀象歲久差吪命安重泰等重修建揆政閣于慶
紀年便攷v30右議政兪拓基奏三陟府有世宗朝所造布帛尺云今若取来依經國大典度量衡條所載使巧思者分造各尺頒行中外亦庶㡬乎同律度量衡之義也上遂命戶
東國歷代總目v02上愍王氏不祀命有司以太祖惠宗成宗顯宗文宗元宗忠烈恭愍八君立廟祀之至世宗朝有司言宗廟只祭五室而前朝之廟乃祭八位未合於禮遂以太祖顯宗文宗元宗有功德於民只祀四君○世傳麗太祖微時
震史記略v1月一日誕降于咸興歸州洞私邸仕高麗官至將相太祖卽位封永安君戊寅冊封王世子九月受禪位庚辰傳位于太宗世宗己亥九月二十六日昇遐于仁德宮在位二年在上王位十九年春秋六十三肅宗辛酉追上廟號定宗加上諡號有十五男
震乘總v1顯宗文宗元宗忠烈恭愍八君立廟祀之世傳麗太祖微時常遊仰岩寺及卽位爲願刹國亡後影幀尙存於其寺故立廟於此世宗朝有司言宗廟只祀五室而前朝廟乃祭八位不合於禮遂以太祖顯宗文宗元宗有功德於民只祀四君文宗廟訪其孫王
羹墻錄v1追風烏産女眞四曰發電赭産安邊五曰龍騰紫産端川六曰凝霜白産濟州七曰獅子黃産江華八曰玄豹産咸興世宗命護軍安堅圖其形集賢學士成三問等作贊以傳後肅宗又製序竝贊龍飛御天歌文獻備考
見睫錄v1太宗王妃誕世宗妃夢太宗抱世宗坐於日輪中未幾太宗卽位世宗又承太大統上同
記聞v1李隨世宗潛邸時師傅卽位擢用鳳山人
大東遺事v1宣王忠肅王忠惠王忠穆王忠定王恭愍王辛禑辛昌恭讓王竝僞主二世凡三十四世共四百七十五年○本朝太祖定宗太宗世宗文宗端宗復位世祖反正德宗追崇睿宗成宗燕山君廢主中宗反正仁宗明宗宣祖光海君廢主元宗追崇仁祖反正孝宗顯宗
大東遺事v2出睿裁天日之度漏晷之刻不差毫釐千里工匠無能副上意者惟護軍蔣英實運奇騁巧無不沕合上心世謂朴堧及英實爲我世宗製作之美應期而生云○行養老宴男則上親臨養之女則王妃臨養之○命黃喜孟思誠等議移慶源寧北西鎭二州本我祖興
大東遺事v2我朝性淸簡端重爲宰相持大體又解音律嘗執一笛一日弄三四聲閉門不接賓客有稟事者則令開門引接去則又復關門佐世宗官至左議政卒諡文貞○追冊權氏爲純嬪丁巳奉氏又以不德廢世宗特冊權氏爲嬪辛酉七月誕魯山翌日而薨年二十四文
大東遺事v2門不接賓客有稟事者則令開門引接去則又復關門佐世宗官至左議政卒諡文貞○追冊權氏爲純嬪丁巳奉氏又以不德廢世宗特冊權氏爲嬪辛酉七月誕魯山翌日而薨年二十四文宗悼念不已不復置姬侍云
大東彙纂v1元敬王后昇遐世宗去床伏苫日夜痛哭不進膳左右密以油紙藉其下上命撤去大雨水溢入廬次上猶不移曰母后遘疾竟不得效身之死生所不
東藩大義v1設抑亦爲忠孝者勸抑亦爲國家之休矣臣溥謹拜手稽首而記之復歌頌聖德書于館壁頌曰明明太宗愼厥始兮穆穆世宗善述事兮於皇我王循舊章兮三聖一心至治彰兮華山之西漢江之北慕華館兮於千萬億錦南集
俟百錄v1敢知也夫然則時烈非妄則愚也國家大禮何可必循此人之議而定之也時烈又曰爲父者一身之上其斬不已多乎至以世宗朝八大君設辭而證之臣愚臣以爲世宗之聖壽雖無疆而八大君雖皆短命豈有八大君各立三年而不幸而死文宗世祖兩大
小華龜鑑v1仕麗考工佐郞○諡恭順世宗朝以廣平爲後
辛壬紀年提要v1念一日入診諸臣曰予疾病沈綿無以摠察萬機昔唐太宗使太子聽政矣李頤命對曰省文書使人讀奏召世子參快宜倣世宗文宗故事然此不可與臣一二臣議定當詢諸大臣矣旣退上獨召頤命顧承宣南道揆曰上敎雖如此無承史不敢入遂不進
野乘v1季甸曰人各有心論事之敗之榮不如貪嘿之恥之深耶遂卒下枕疏極諌者非一再矣上官終下着名物論議之每進封章世宗曰季甸之疏又来矣遂有大用之意尋擢同副承旨次陞知申
靑野謾集v1世宗朝李賢老以風水之說請以都內川渠禁投穢物以淸明堂之水集欑校理魚孝瞻上疏曰范越鳳五季一術士耳其所謂明
讀史隨筆v1○祖有功宗有德不可改也西漢唯高祖太宗世宗中宗四君而已王莽尊元帝爲高宗成帝爲統宗平帝爲元宗尋罷至東漢光武稱世祖其下明帝稱顯宗章
歷代帝王紀年v01十七年丁未五月日誕降洪武十五年壬戌辛耦時擢進士癸亥登科吏曹正郞壬申提學建文辛巳卽位永樂十六年戊戌禪位世宗壬寅五月初十日昇遐春秋五十六在位十八年在上位四年卽位八年太祖昇遐卽位十一年立成均館卽位十三年作號牌
國朝捷錄v01遠字遺德太祖第五子丁未五月十六日誕降于敀川洞初封定安大君建文庚辰冊封世子辛巳受禪永樂十二年戊戌傳位于世宗永樂十六年壬寅五月十日昇遐在位十八年在上王位四年壽五十六獻陵廣州三十里乾坐有十二男十七女辛巳褒贈鄭夢
郯述v02世宗丙午式固城 直學
記文雜錄v2縱之恩終矧可保乎爲萬全之計不如徏南民以實之也金公 從其言力請于朝而行之竣事還以勞陞禮曹正郞十年未調及世宗文宗 相繼昇遐端宗 以冲齡嗣位大權將移主勢日削顧命十大臣金宗瑞皇甫仁 等皆殺死旣而世祖以首陽大君 受
記文雜錄v2苦功業未弱冠儼成鉅儒時人擬之謝庭二樹仲孫 先公登第官至叅贊而公用宰執薦蔭補仁壽府承司溫署直長正統丙辰世宗 親策士問待夷裕食之道公擢丙科實與忠簡公李塏 同榜公名父子夙有聲譽旣通籍物議皆許以淸要而有女弟選爲
文獻攷略v1戊戌十八年冊世宗爲世子八月禪位○明永樂十六年
重訂南漢志v1世宗朝置鎭鎭管牧一都護府一郡一縣五驪州牧利川府楊根郡砥平陰竹陽智竹山果川縣
靑邱風雲v1太祖壬申至戊寅七年定宗己卯至庚辰二年太宗辛巳至戊戌十八年世宗己亥至庚午三十二年文宗辛未至壬申二年端宗癸酉至乙亥三年世祖丙子至戊子十三年德宗追尊睿宗己丑一年成宗庚
名數咫聞v1有激楚同姓四臣四賢君臣義重留楚四難四人百代殊絶項羽骨鯁四臣讀書不識字四人項氏四侯漢四賢王商山四皓四世宗正漢四相四世太尉楊震四知南朝四侍中吳祐四行北朝四俊穎川四長令君四俊漢四高士錦江四俊武侯四德四龍武侯四
韓史綮v1第一卷太祖定宗太宗世宗文宗端宗世祖睿宗成宗燕山主中宗第二卷仁宗明宗宣祖第三卷光海主仁祖孝宗顯宗第四卷肅宗景宗英祖正祖第五卷
東國續修文獻錄v1太宗朝太祖第五男丁未五月十六日誕降庚辰受禪戊戌傳位世宗壬寅五月十日昇遐在位十八年在上王位四年春秋五十六諡恭定有十二男十七女獻陵
國朝人物志v1一編太祖朝定宗朝太宗朝世宗朝文宗朝端宗朝世祖朝睿宗朝成宗朝燕山朝中宗朝一二編
國朝人物志v3字直夫號白江又號鳳岩牧使綏祿子世宗別子密城君琛五世孫宣祖辛丑進士光海己酉文科歷檢閱舍人仁祖朝冊孝宗
(新編) 尺牘大方v1世宗族이同居共㸑張公藝、九世同居、崔倕、三世共㸑은人家美事나分門異戶에轉至他鄕居生야情話隔絶니伏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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