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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흠지(鄭欽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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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요좌(堯佐)
시호(諡號)문경(文景)
생년1378(우왕 4)
졸년1439(세종 21)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부(鄭符)
조부정양생(鄭良生)

[상세내용]

정흠지(鄭欽之)
1378년(우왕 4)∼1439년(세종 2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요좌(堯佐). 고려 감찰대부(監察大夫) 정양생(鄭良生)의 손자로, 정부(鄭符)의 아들이다.

진사성균시에 합격한 뒤 음사(蔭仕)로 벼슬이 지평에 이르고, 1408년(태종 8) 좌정승 하륜(河崙)을 탄핵하다가 먼 곳에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와 14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병조정랑좌헌납을 거쳐 1416년 장령이 되었다.

이때 좌의정 박은(朴誾)정탁(鄭擢)과 노비문제로 송사를 일으키자, 박은을 탄핵하다 미움을 받아 배척당하여 4년 동안이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이 되고, 이어 집의지형조사(知刑曹事)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기밀(機密)을 관장하였다.

그뒤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오르고,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무사가 되어 연해의 주군(州郡)의 성터를 심정(審定)하였다.

1435년(세종 17)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새로 설치한 회령 등 4진(鎭)의 수비에 공헌하고, 어머니의 병환으로 돌아와 중추원사가 되어 죽었다.

사람됨이 풍채가 좋고 밖으로는 유화하나 내심은 강직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사기(史記)』『한서(漢書)』를 잘 외었다. 일찍이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진설(陣說)』을 지어 올렸고, 천문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박천규(朴天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6-21紀年便攷 5권을 참고하여 "낭생(郞生)의 손자"를 "양생(良生)의 손자"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