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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尹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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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윤철(尹哲)
자(字)실부(實夫)
호(號)별동(別洞)
생년1373(공민왕 22)
졸년1455(단종 3)
시대조선전기
본관예천(醴泉)
활동분야학자 > 유생
윤선(尹善)
출신지예천군
저서『별동집(別洞集)』

[상세내용]

윤상(尹祥)
1373년(공민왕 22)∼1455년(단종 3).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

예천군의 향리인 윤선(尹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하여 양반신분으로 올랐다. 향리 역(役)에 종사하면서 퇴식(退食)을 오가는 사이에 솔기름을 취하여 몰래 숨겨두었다가 밤에 책읽기에 쓸 정도로 끈기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에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예천에 유배되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杠) 등과 함께 수업하여 그 문인이 되고, 그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에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안동상주한성 서부 등지의 교수관(敎授官)을 거쳐, 예조정랑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가친이 연로하여 외직을 청하여 황간영천(榮川)대구 등지의 군사(郡事)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으로서 원손(元孫: 단종)의 입학례를 거행할 때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이 이를 영예로 여겼다.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그 문하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문종 초에 고령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니, 국왕이 사궤(食饋: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음식물)를 내렸는데, 고령으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궤물(饋物)을 내리는 제도는 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향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3년여 만에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조용을 통하여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그는 특히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왕조 초기의 중앙학계에 성리학의 기운을 진작,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개별적으로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주역』을 가르쳐 정몽주 계열의 도통(道統)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다.

저서로는 『별동집(別洞集)』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海東名臣錄
筆苑雜記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