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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朴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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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보(敬夫)
호(號)설봉(雪峰)
시호(諡號)혜숙(惠肅)
생년1362(공민왕 11)
졸년1444(세종 26)
시대조선전기
본관운봉(雲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원종공신(原從功臣)

[상세내용]

박신(朴信)
1362년(공민왕 11)∼1444년(세종 26). 고려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운봉(雲峰). 자는 경보(敬夫), 호는 설봉(雪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옮겨 사헌규정(司憲糾正)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제군부(諸君府)를 둘 때 중낭장으로서 군부도사를 겸대(兼帶)하였으며, 예조형조정랑에 승진되었다.

1392년(태조 즉위)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으며, 이듬해 사헌시사(司憲侍史)교주강릉도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감문위대장군 겸 사헌중승(監門衛大將軍兼司憲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1395년 형조도관으로서 노비문제를 상언(上言)하여, 공사노비(公私奴婢)에 대하여 다른 도감을 두고 새로운 노비문서를 만들고 옛 문서는 소각하여 노비문제에 대한 쟁송을 없애려고 하였다.

1397년 간관(諫官)으로서 변정도감의 속공(屬公)한 노비로 방환(放還)한 노비의 수를 보충하자고 하여 관철시켰다.

1398년 쓸데없는 관직을 줄이고 군자전(軍資田)이 적으므로 녹과전(祿科田)으로 정하지 말고 저축에 대비하자고 하였으며, 또 아일(衙日)에는 정전(正殿)에서 조회(朝會)를 받고 정무 볼 것을 상언하기도 하였다.

1399년(정종 1)에는 형조전서가 되었다가 1400년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승추부좌부승지(承樞府左副承旨)로 기용되었다.

1401년 참찬관승지(參贊官承旨)로서 경연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1402년 대언(代言)사헌부대사헌에 특배(特拜)되고, 각도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곡식의 손실을 검사하자고 주청하였다. 다음해에는 광주목사로 나갔다가, 1404년 개성유후(開城留後)승녕부부윤(承寧府府尹)이 되고 11월에는 참지의정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5년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제조(提調),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대사헌으로서 ‘전후가 맞지 않는 계문(啓聞)을 올렸다. ’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순군사(巡軍司)에 하옥되었다가 아주(牙州)로 귀양갔다.

1406년 귀양에서 풀려나 경외종편(京外從便: 서울과 시골에서 일을 편한 대로 좇음.)되었으며, 다시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로 기용되자 경성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자고 상소하였다.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다시 기용되어 세자가 정조사(正朝使)명나라에 갈 때 요동까지 호종하고, 돌아와 공조판서에 올랐다.

1408년(태종 8) 서북면도순문찰리사평양부윤이 되었으며, 1409년 정조에 활과 화살을 바쳐 학문을 전폐시키는 단서를 만들어주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10년 다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기용되었으며, 이듬해 노비변정도감을 두었을 때 호조판서로서 제조가 되었다.

그뒤 호조판서병조판서의정부찬성이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1418년(세종 즉위) 봉숭도감(封崇都監)제조가 되었으며, 이어서 선공감제조가 되었으나 선공감 관리의 부정으로 통진현에 유배되었다가 12년 만에 소환되어 죽었다.

시호는 혜숙(惠肅)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대표명박신(朴信)
성명박신(朴信), 박신운(朴信雲)
시호혜숙(惠肅)
저헌(樗軒)

성명 : "박신(朴信)"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1制同堂異室始於漢明率意改古歷代因循遂不敢復三代之制及至神宗有意復古竟不能遂而宋儒美之今能復古萬世幸甚朴信曰非爲無材瓦而受人力也特宗廟爲至重而輕改爲不易耳上同
國朝彙鑑v1爲某年某月某日犯某子某孫生日計其子孫利害如子孫衆多者或至二三年不葬者亦多有之俚俗無知不可不變吏曹判書朴信曰陰陽家集諸家葬書異論蜂起誑惑齊民請令書雲觀悉集葬書撮其大要其他怪異之書悉除之上曰讖緯之說論者皆不取
紀年便攷v2雲峯 朴信 太祖 列 從愚 太宗 列
震史記略v1世弟宜承大統予遜王位將退私第優遊頤養以保頤期○上講大學衍義論趙高事曰宦官之設本以給事豈可任國柄承旨朴信曰人主亦知其不可朝暮侍側甘言媚悅以墜術中故防微社漸於未然○十二月上王幸江陵上元寺○置朔方節度使開營鏡
震史記略v1六年丙戌東北面都巡問使朴信請令野人互相來市從之○知濟生院事許衜上言請擇童女數十人敎以脉經鍼灸之法使治婦人病從之○上卽位後連歲旱
職官考v01朴 信
文獻攷略v1河崙曰同堂異室始於漢明歷代因循遂不復三代之制宋神宗有意復古竟不能遂而宋儒美之今能復古制萬世幸甚朴信曰宗廟至重不可輕改遂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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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