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권진(權軫)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AD8CC9C4FFFFB1357X0
호(號)독수와(獨樹窩)
시호(諡號)문경(文景)
생년1357(공민왕 6)
졸년1435(세종 17)
시대조선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희정(權希正)

[상세내용]

권진(權軫)
1357년(공민왕 6)∼1435년(세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독수와(獨樹窩).

부친은 감찰규정(監察糾正) 권희정(權希正)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377년(우왕 3) 21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촉망을 받았다. 당시 권세가인 염흥방(廉興邦)이 자기의 조카딸과 혼사를 맺고자 했으나, 권세가와 혼인하기를 거절하여 염흥방의 미움을 사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뒤 연해안지방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의창현령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선정을 펴니,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이성계(李成桂)가 발탁하여 전주판관으로 삼았다.

1398년(태조 7) 성석린(成石璘)평안도로 나가 민심을 수습할 때 특별히 천거하여 경력(經歷)으로 삼았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문하부 직문하(直門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지형조사(知刑曹事)에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지내고, 1406년 강원도관찰사에 부임하여 선정을 폈다. 청렴함이 알려져 이듬해 대사헌에 발탁되었으며, 관의 기강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1413년 충주목사를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17년 형조‧호조‧이조 판서를 지냈다.

1426년(세종 8)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1430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형률의 잘못 적용으로 백성 10여명이 강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33년에는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재직 때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세종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목조(穆祖)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의 사적을 서술하였으며,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제조(提調)가 되어 악률(樂律)을 만드는 데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