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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량(柳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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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중(明仲)
시호(諡號)충경(忠景)
생년1355(공민왕 4)
졸년1416(태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계조(柳繼祖)
공신호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공신호좌명공신(佐命功臣)

[상세내용]

유량(柳亮)
1355년(공민왕 4)∼1416년(태종 1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명중(明仲).

고려 밀직사(密直使) 유계조(柳繼祖)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을 거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고, 1390년(공양왕 2)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392년 이조전서(吏曹典書)로 있을 때, 조선왕조 개국에 협력한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397년(태조 6)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왜구가 침입하여오자 이를 맞아 싸워 크게 무찔렀다.

형세가 불리해진 왜구들이 항복을 청해오자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일거에 섬멸하려는 전략을 세웠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왜구들이 도망쳐버렸다. 그 죄로 합산(合山)에 유배되었다가 1398년 나주로 이치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있다가 1400년(정종 2)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 문성군(文城君)으로 봉작되었고, 그해 동북면순문사(東北面巡問使)가 되어 변방을 살피고 돌아왔다.

1404년에 대사헌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예문관대제학도 겸하였다.

그뒤 판한성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올랐으며,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413년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가 1415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조선왕조 창건에서 제도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명신 중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