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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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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종지(宗之)
호(號)삼봉(三峰)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342(충혜왕 후3)
졸년1398(태조 7)
시대조선전기
본관봉화(奉化)
활동분야정치 > 정치가
정운경(鄭云敬)
고조부정공미(鄭公美)
저서『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저서『심문천답(心問天答)』
저서『심기리』
저서『불씨잡변』
저서『조선경국전』
저서『경제문감』
저서『경제문감별집』
저서『경제의론(經濟議論)』
저서『감사요약(監司要約)』
저서『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저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
저서『강무도(講武圖)』
저서『진법(陣法)』
저서『진맥도결(胗脈圖訣)』
저서『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
저서『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저서『삼봉집』
저서『금남잡영(錦南雜詠)』
저서『금남잡제(錦南雜題)』
공신호좌명공신(佐命功臣: 中典功臣)
공신호개국1등공신

[상세내용]

정도전(鄭道傳)
1342년(충혜왕 복위 3)∼1398년(태조 7). 고려조선초의 정치가‧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1. 가계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의 맏아들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다.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하였는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하여 동료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2. 출사와 유배생활
1360년(공민왕 9)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에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으며, 이듬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에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하여 북원(北元)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 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재상이 서재를 철거하여 부평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여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3. 이성계와의 결연
1383년에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 함주 막사에 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에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에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이 되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봄 이성계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정도전의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4. 조선왕조 개창
그러나 정몽주이방원(李芳遠)일파에 의하여 격살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나와, 같은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몸에 안았다. 같은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에 「문덕곡(文德曲)」‧「몽금척(蒙金尺)」‧「수보록(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하였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병권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해 6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고 이해에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하였으며, 한양천도를 계획, 실천하여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에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찬진하고,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하여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에 이른바 표전문(表箋文)문제가 일어나 명나라가 이를 트집삼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에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에 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5. 제1차왕자의 난에 희생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6. 사상과 학문배경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여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의론(議論)이 정연하였다 한다.

그는 개국과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劉邦)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老弱奴婢)약간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며,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그의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차씨(延安車氏) 차공윤(車公胤)의 외예얼속(外裔孽屬)이었으며,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3노가(奴家)의 하나로 세인의 평을 얻게 되었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왕조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하였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왕조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 (1375)‧『심기리』 (1394)‧『불씨잡변』 (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하여 분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유교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가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해서 주자학의 전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하여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7. 경세론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 (1394)‧『경제문감』 (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 모두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8. 저술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經濟議論)』『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진법(陣法)』 등이 있고, 의서(醫書)로서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는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시간(始刊)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으며, 1791년(정조 15)에 누락된 것을 수습하여 재간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太宗實錄
三峰人物考(李相佰, 震檀學報 2‧3, 1935)
鄭三峰의 儒佛觀(李丙燾, 白性郁博士回甲紀念論叢, 1959)
鄭道傳의 闢佛論批判(李鍾益, 佛敎學報 8, 1971)
鄭道傳의 闢佛思想과 그 論理的 性格(琴章泰, 閔泰植博士古稀論叢, 1972)
鄭道傳思想의 硏究(韓永愚, 韓國文化硏究叢書 15, 1973)
高麗國史의 編纂內容과 史論(邊太燮, 學術論叢 3, 1979)
鄭道傳의 人間과 社會思想(韓永愚, 震檀學報 50, 1980)
三峰集에 나타난 鄭道傳의 兵制改革案의 性格(鄭杜熙, 震檀學報 50, 1980)
鄭道傳 性理學의 特性과 그 評價問題(尹絲淳, 震檀學報 50, 1980)
三峰集編刊考(末松保和, 朝鮮學報 1, 1951)

[집필자]

한영우(韓永愚)

성명 : "정도전(鄭道傳)"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戊寅鄭道傳之亂被禍○初封君贈楸城公肅宗庚申加贈大君諡恭順改諡章惠○娶開城王氏高麗宗室歸義君瑀女有繼子
國朝編年v01大明初興李仁任池大淵等主事元鄭道傳朴尙衷主事明及崔瑩當國遂倡事元之議至是瑩勸禑決策攻遼督發諸軍瑩與禑留平壤日夜縱樂時太祖功名日盛且有李
國朝編年v01二月冊弟靖安君爲儲嗣平苞亂之後參贊門下府事河崙等啓曰鄭夢周之難若無靖安君則大事幾不成鄭道傳之難若無靖安君亦安有今日乎且以昨日事觀之天意人心亦可知矣請早定位號上曰是予意也依卿等之請以靖安君爲世
國朝編年v01辛巳元年鄭道傳之伏誅也芳碩之黨皆潰金桂蘭獨不去南誾之逃僕從皆散獨崔沄扶掖不去上義之任以近侍桂蘭位至三品沄至二品○元
國朝編年v02其於宗社生民何因垂淚上曰勿復言也予以否德君臨民上旱乾之災其譴在予豈可爲一身飮酒命柳觀尹淮改修高麗史初鄭道傳鄭摠等修史因李穡李仁復所撰金鏡錄撰之道傳以元王以下事多僭擬稱宗者書王稱節日者書生日朕則書予詔則書敎乃
國朝編年v06情不容人僞之雜純乎虛靈之天自能感通前定籤應不爽我太宗朝有彼南山彼伐石釘無餘矣之謠釘伐石之具也未幾南誾鄭道傳以事誅南謂南誾也釘與鄭同音謂鄭道傳也餘字釋俚語與南誾之音相似謂鄭無矣成廟朝有望馬多勝瑟於伊羅之謠望馬
國朝編年v08才望可堪後日大用者兼門下給事中代行郞廳之事則名號旣重事權自別庶有朝廷體面矣崔遲川集今禮曹是古之三軍府鄭道傳掌軍國重事見議政府所搆之制乃曰政府軍府一體遂依其制而搆之屹然東西相對其棟宇宏壯非他司之比其後革三軍府
國朝編年v12嫉久矣云云與賊不知不交國人所知云云吊喪時觀汝立爲人槪狡滑故矣身常戒安敏學李潑勿爲親厚云云況三峯乃姦臣鄭道傳之號其何蹈襲姦臣之號乎更推供曰其詩全篇不記牛溪一夜風生虎仙李根搖有髮僧矣身本不能書今見此詩所書字體茫
國朝彙鑑v1四年命鄭道傳名新宮諸殿道傳撰名竝書所撰之意以進名新宮曰景福臣按宮闕人君所以聽政之地四方之所瞻視臣民之所咸造故壯
國朝彙鑑v1仁恭儉勇略過人仕高麗累官至將相常從太祖立戰功及太祖卽位封爲永安君洪武戊寅八月靖安君太宗大王平鄭道傳之亂太祖欲冊靖安君爲世子靖安君以序固讓于上於是冊上爲世子九月受內禪卽位于景福宮之勤政殿尊太祖爲
國朝彙鑑v1有濟世之志河崙素好相人傾心附之每見必謂人曰斯人蓋天英氣壬申秋密與諸將相定策開國太祖卽位封靖安公戊寅平鄭道傳亂固讓于恭靖恭靖二年庚辰遂冊爲世子句當軍國重事冬十月上受內禪卽位于壽昌宮
國朝彙鑑v1者誣公以罪欲加極刑又指誰歟請訊崙依法治罪近斬棺瀦宅籍沒家産以懲後來崙凡四上書自辨曰所謂忌公者指南誾鄭道傳而言也若用事之臣陰謀之事皆以爲出於太祖之命則如縊殺李種學杖殺李崇仁等六七人之事此豈太祖之所知
國朝彙鑑v1悉除之上曰讖緯之說論者皆不取焉然以漢光武之明猶惑圖讖是光武之不純乎道也我朝讖書所言木子走肖之說鄭道傳以爲此必好事者之所作然竟從是書遂上受寶籙之曲大臣莫不信之予爲靖安君時尙不之信遷都之日河崙深信此書
紀年便攷v5宲封三百戶田二百結奴婢二十口沈德符青城郡忠義伯田一百五十結奴婢十五口鄭夢周偰長壽池踴奇成石璘朴葳趙浚鄭道傳䓁七人并忠義君各田一百結奴婢十口
紀年便攷v5太廟○尊㝎妃安氏爲王大妃尊母王氏爲三韓國大妃○禮成江水赤三日○王如積慶園逅王四親爵謚使母弟瑀主祀○遣鄭道傳如京師賀聖郞也○遣藝文提學韓尙敬如京師賀千秋且奏曰彛初誣妄臣不敢先辨虚宲乞遣王官究問禮部召使臣曰爾國
紀年便攷v5以沈德符及我太祖領經筵事鄭夢周鄭道傳知經筵事
紀年便攷v5言不幸及周公忽有嘉禾起大風聞道西原洪水漲知是天道古今同又柳爰廷還自京師啓曰帝知彛初誣安遠流于漂水縣又鄭道傳䓁還自京師宣諭聖㒲曰尹彛李初謀亂汝團朕旣不信已曾断罪爾國復何憂疑
紀年便攷v5賀正○罷修內城○收鄭道傳職牒錄劵移配羅州子津湛皆廢爲庶人南誾力不能救乃稱疾自免○召還李穡李崇仁○量移鄭道傳于奉化○宜州大枯樹復生時人以爲我太祖開國之兆也○九月元信宅主神懿高皇后昇遐春秋五十五
紀年便攷v5婦女徃來佛寺○彗見十餘日○帝遣宦者求馬一萬匹宦者二百人○定服制式一依大明之制䘮三年內不許娶婦及宴飮○鄭道傳上書都堂請誅李穡禹玄寶○憲府請黜宦者金師幸金完不聽○流李穡于咸昌因憲府論奏也○復修演福寺乍罷而更营之
紀年便攷v5坮諌請寘極刑王以㓛臣宥之又以內懷姦惡外施忠直請加罪王放敀其郷奉化縣○遣世子奭如京師賀正○罷修內城○收鄭道傳職牒錄劵移配羅州子津湛皆廢爲庶人南誾力不能救乃稱疾自免○召還李穡李崇仁○量移鄭道傳于奉化○宜州大枯樹
紀年便攷v5徐甄利川人福川熙五世孫寺尹瓉子恭愍王壬寅以進士登科官止掌令恭讓王壬申以掌令與諌官金震陽李擴等請罪趙浚鄭道傳南誾泊鄭夢周殉國坐震陽夢周之黨放流之是年麗亡遯居衿川坐不北向終身不對 漢陽太宗壬辰因其詩大臣臺諌請鞫
紀年便攷v5金震陽慶州人字子靜號草廬一草屋子恭愍王辛亥登科官止左常侍與諌官徐甄李擴等劾趙浚鄭道傳論道傳䟽曰施刑於不可刑之地求罪於本無罪之人施刑於不可刑者謂禑昌父子求罪於本無罪者謂李穡諸大夫也性慷慨
紀年便攷v5曰文墨末藝出身盗名黨附堅味恣行不法父母之䘮未滿三年母死纔百日啗肉自若權近上䟽力辨其誣以鄭夢周之黨遠流鄭道傳使黃居正杖崇仁一日数百不死乃橫載馬馳数百里潰瀾死太祖受命愛惜其才將欲徵用而崇仁已卒太宗潜邸時登崇仁榜
紀年便攷v5敦備與鄭夢周同心恊議立學校禁族婚革夷風遵華制麗末巨室之貪縱林堅味廉興邦李仁任最其尢者也不協於三人又被鄭道傳誣以朋比夢周被劾並諸子削職遠流仕麗朝歴提學賛成事門下右侍中錄㓛封丹陽府院君恭讓王庚午判三司事復封丹山
紀年便攷v5引原頫先以示意原頫嚴斥曰左脇金麟尙在而誰爲辛氏乎寧喫三斗醋不參有㓛選乃屏居躬耕于平山太祖即位授官不受鄭道傳咸溥霖趙英珪河崙皆爲車柳外裔之孽原頫皆直書於家譜四人以此嗛之誣以不䡄遣力擊殺之縱殺其親戚門生七十餘人
紀年便攷v6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夢周乘太祖病篤嗾臺諌劾趙浚鄭道傳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太祖太宗謀去夢周 太祖兄元桂婿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
紀年便攷v6克廉及趙浚金士衡鄭道傳南誾䓁啓請王子諸君服御騶從不可不備用度不可不足乞於本科外加賜田圡 上曰本科百餘結不至飢寒若又加賜則人
紀年便攷v6庸起忭曰不有郷予焉至此郷之㓛與德予敢忘諸皇天后圡在上在㮄世世子孫無相害也予所有負於卿者有如此盟○復以鄭道傳為奉化郡忠義伯趙胖知密直事○王遜于原州尋移杆城郡封恭讓君後三年甲戌薨于三陟府後追封恭讓王○七月丙申
紀年便攷v6進靖安君太宗私邸爵号上第五子興同知密直司事南誾㝎計誾密与吏判趙仁沃判三司事趙浚忠義君鄭道傳大司成趙璞䓁五十二人協謀推戴侍中大臣裵克㢘䓁率國人奉國璽宝詣潛邸塡咽街巷 上閉門不納至晩克廉䓁排門直
紀年便攷v6潛邸塡咽街巷 上閉門不納至晩克廉䓁排門直入寘宝廳事上羅拜呼千歲 上不得已卽位先是鄭夢周使坮諌先劾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䓁流遠州將及上時靖安君廬于齊陵聞變馳還用鄭擢計欲使佟豆蘭殺夢周豆蘭曰我公不知之事
紀年便攷v6鄭道傳南誾李稷䓁相宅于漢陽本高句麗南平壤城百濟近肖古王自南漢来都䖏也初上於鷄龍山下相宅始役夢一神人曰此乃奠
紀年便攷v6地且問藏衣之地無學乃占於楊州曰 殿下世世皆葬於此 上旣卜健元陵回過一峴曰予自此忘憂遂名忘㥑峴云○召鄭道傳䓁諸勳臣寘酒張樂上酒酣謂道傳曰寡人之得至於此郷䓁之力也相與敬愼期至子孫萬世可也道傳曰願 殿下毋忘墜馬
紀年便攷v6鄭道傳與玄寶有宿怨請穡玄寶寘極典 上曰卿勿再言召穡待以故舊賜田及米豆蘭肉曰卿已老矣宜復食肉穡事佛断酒肉故有
紀年便攷v6乙亥四年洪武二十八年改鑄印信○奉化伯鄭道傳纂進經國大典仿周禮六官一曰治典吏典二曰敎典戶典三曰禮典四曰政典兵典五曰刑典六曰事典工典命河崙更為詳定
紀年便攷v6帝以賀正表有戲侮字怒徵撰表人鄭道傳道傳稱疾近請往善為奏白 帝待以優禮命題賦詩賜酒妓樂
紀年便攷v6獻兵伏 上曰旣盡一船何無一生擒者乎命護軍金聸審覈果使船也鞫訊依律䖏刑以徇○設奴婢辨整都監○遣都宣撫使鄭道傳晝定郡縣地界許以便宜上以乎書賜衣酒曰相别日久思想殊甚敬遣辛中樞往問行役崔兢適至備知動止稍自慰觧今將襦
紀年便攷v6鄭道傳之亂芳碩芳蕃出走西門都堂追捕乃殺之也云
紀年便攷v6戊寅七年洪武三十一年寘有備庫專應軍需也○五月 大明太祖高皇帝崩皇太孫立○禁法外刑因刑判柳寬所啓也○鄭道傳南誾䓁㐲誅初道傳䓁附芳碩忌諸王子請依皇子封王之例分遣諸王子於各道上不荅卜者安愼言世子異母兄有天命者非
紀年便攷v6鄭道傳亂後 上卽位錄義安大君和䓁二十九人○十一人後以罪削勳
紀年便攷v6學衍義曰讀書可以為國 上見其器宇不凡與論國事大悅待之如舊識及回軍舉為知密直兼大司憲事無大小悉咨之浚與鄭道傳亦傾心嚮附以經濟為己任知無不言時田制大壞兼并占奪小民怨咨上與浚及道傳議革私田浚上疏極論舊家世族交相謗
紀年便攷v6義安大君和桓祖三男定安翁主金氏出號二樂亭壬申與興安君李濟謀殺鄭夢周策開爴㓛一等戊寅密告鄭道傳謀於太宗道傳及南誾等㐲誅定宗朝策定社㓛一等太宗朝策佐命㓛二等官止領相謚襄昭配享太祖廟庭太皇帝壬申贈領
紀年便攷v6鄭道傳
紀年便攷v6鄭道傳奉化人刑部尙書云敬子忠惠王甲戌生字宗之號三峯李穡門人而反攻之恭愍王壬寅以進士登科辛禑初以事流會津縣後
紀年便攷v6第七子 神德王后誕生歸義君王瑀 婿仕高麗官止考功卽太祖壬申封君癸酉改領軍官職又為左軍節制使戊寅太宗戮鄭道傳南誾世子芳碩遂及焉則芳蕃亦不免時年十八初謚恭順改章憲太祖悼念二殤屡幸僧舍供佛以資冥福太宗追舉恤典世宗
紀年便攷v6花山府院君定道傳之亂定宗朝策定社功二等官止輔國參賛謚僖襄○子哲以義州千户與我太祖同錄威化島回軍之功定鄭道傳之亂定宗朝策定社功二等封花城君官止嘉善中樞院副使謚莊襄
紀年便攷v6進賢舘大提學文學冠一時經世禮文事大詞命皆出其手一時名士多出其門丙子 帝覧賀正表怒以為有戱侮字徵撰表人鄭道傳道傳病不行近曰撰表之事臣亦與知願自往及入朝叩頭曰小國事大不因表文無以達情而臣等生長海外學不通方使王之
紀年便攷v6有三道方伯掛三印於洞樹三方伯躍進執手與歸 上事以師禮問定都之地無學乃至漢陽曰以仁王作鎭白岳南山為龍虎鄭道傳曰自古帝王南面為治遂主白岳無學曰垂二百年當思吾言新羅僧義相秘記云都漢陽者若聽僧言稍可久存若鄭姓人出而
紀年便攷v6蔭始仕庚申倭寇徃征盡殱恭讓王元年參中興功多智畧才堪將帥我太祖與德符及池湧奇鄭夢周偰長壽成石璘趙浚朴葳鄭道傳等是為恭讓王九㓛臣議禑昌本非王氏不可奉宗祀又有天子之命當廢假立眞乃立瑤為王是為恭讓王封德符為青城府院
紀年便攷v6年始設四學○悉罷諸神祠舊例每歲設祝壽齋并命罷之○大旱遣官賑之○冬雷大稼○始自宮中納麻枲以備紡績○追廢鄭道傳䓁為庶人道傳及黃居正孫興宗䓁以懷私憾殺无辜之罪廢為庶人禁錮子孫○改定 宗廟薦新法新物之及時出者不待朔
紀年便攷v6右代言徐選請庶孽子孫勿許東西班正職以别嫡庶之分成宗朝賛成姜希孟継之曰子孫子子孫孫遂為㝎法選與鄭道傳有隙倡為此議退朝觧衣其妻問今日朝廷有何事選曰余啓塞庶孽正職其妻愕然色沮曰公其旡嗣乎後果如其言
紀年便攷v6李茂丹陽人版圖判書居敬子恭讓王辛未生字敦夫號中亭麗朝文科有撃破哈丹之功威化之行與沈德符為副元帥以鄭道傳南誾之謀密告于太宗太宗盡知之錄定社功一等佐命功一等并削封丹山府院君太宗壬午拜右相入耆社趙大臨之獄以時
紀年便攷v6崔關海州人有渰玄孫護軍郾子閔安仁婿辛禑壬戌文科其為獻納也與金震陽徐甄等論鄭道傳等賣國不忠之罪及我朝開國與震陽等遠竄太宗朝收用乙酉為直提學官止藝文提學
紀年便攷v6金桂蘭崔沄鄭道傳之誅也芳碩之黨皆潰桂蘭獨不去南誾之逃也僕從皆㪚沄獨扶腋避匿終不去 上義之任以近侍之職桂蘭位三品沄位二
紀年便攷v6黃居正李崇仁以鄭夢周黨流于嶺南我 朝受命鄭道傳為柄臣居正時為道傳私人出宰于崇仁所配之邑一日之內杖数百不死乃縳載于馬馳数百里遂潰爛而死太宗朝策勳位宰
東國歷代總目v01大明初興李仁任池大淵等主事元鄭道傳朴尙衷等主事大明及崔瑩當道倡事元之議至是大明立鉄嶺衛設置官站瑩勸禑決策攻遼東太祖大王陳其不可禑不聽以
東國歷代總目v02遣靖安君卽太宗大王朝京師○帝以本國遣人齎金帛至遼東誘邊將又說女眞潛渡鴨綠江下詔責之使鄭道傳撰表辨明帝以表辭倨傲益怒命遼東毋納朝鮮使已而帝諭送親男於是太宗大王奉表如京師路過燕府太宗皇帝時爲燕王
震史記略v1授鉞大臣巡諸道而行黜陟縣置宰驛置丞立家廟廣學校文治旣洽武威遠宣侍中鄭夢周忌威德之日盛使臺諫先劾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等流遠州將上及太祖時靖安君廬于豊德聞而馳還用鄭擢計欲使李之蘭殺夢周之蘭曰
震史記略v1八月光是高麗知密直李崇仁簽書密直李種學等及李種善趙瑚金震陽李擴以鄭夢周黨癈爲庶人至是崇仁杖流鄭道傳南誾等使邑宰黃居正殺之種學逮繫雞林至茂昌驛體察使孫興宗承道傳旨縊殺之○定科擧之法著昏喪之禮立守
震史記略v1黃海東曰江原西北曰平安東北曰咸鏡○三月令王氏之在海島者分處完山尙州寧州仍召王康王承寶○改御諱旦命鄭道傳撰字曰君晋撰說曰從日從一日出之始也晉明昇之象天日之昇陰翳消釋萬象昭然此人君初政淸明卽群邪屛息萬法俱新
震史記略v1人說誘但遼東都司取脫歡不花之時其管下人民或有不卽隨行者由彼安土非臣勒留無所供於我邦各自守其舊業云鄭道傳之辭也帝以表辭倨傲益怒命遼東毋納朝鮮使使至不得入而還者凡五輩上遣親男與趙胖南在奉表如京師燕王在燕
震史記略v1四年乙亥改鑄印信○奉化伯鄭道傳撰進經國大典倣周禮六官一曰治典吏二曰敎典戶三曰禮典四曰政典兵五曰刑典六曰事典工命河崙更爲詳定名曰經
震史記略v1於羽檄後用虎符蓋高帝出入兵間熟究利病故也請依此制凡動兵奉敎旨以符發之無符者以擅發論從之○遣都宣慰使鄭道傳爲東北面宣撫巡察使以便宜定郡縣界
震史記略v1聖上好生之德乞令中外只依律栲問法外之刑一切禁斷當令辨其辭色驗其證左要明眞僞上嘉納之○八月芳碩作亂鄭道傳南誾等伏誅初上寵康妃愛其子芳蕃芳碩道傳等慫惥立芳碩爲世子忌諸王子請依皇朝封王例分邊於各道上不答
震史記略v1哉集賢殿在禁中亦足記事命申穡魚變甲鄭麟趾皆兼史職○上御經筵敎曰吾觀歷代事何其纖悉也高麗史疎略太甚鄭道傳以元宗以上事多僭擬稱宗者書王稱節日者書生日稱朕者書予詔則書敎乃多更改以沒其實是非出於愛惡善惡謬於舊
震乘總v1校而置敎授文治旣洽武威遠宣天與人歸功高忌集會王西行墜馬肩輿而還侍中鄭夢周恐王威德日盛使臺諫先劾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等流遠州將以上及王時靖安豆蘭不欲害圃隱君廬于齊陵聞變馳還用鄭擢計欲使佟豆蘭
震乘總v1而說誘但遼東都司起取脫歡不花之時其管下人民或有不卽隨行者由彼安土非臣勒留無所供於我邦各自守其舊業鄭道傳之辭也帝以表辭倨傲益怒命遼東毋毋納朝鮮使納朝鮮使使至不得入而還者五輩王諭送親男靖安君與趙胖南在奉
震乘總v1改鑄印信乙亥四年改鑄印信⊙奉化伯鄭道傳纂進經國大典倣周禮六官撰經國大典一曰治典吏典二曰敎典戶典三曰禮典四曰政典兵典五曰刑典六曰事典工典命
震乘總v1月畢役城周九千九百七十五步高四十尺二寸○遣藝文學士權近朝遣權近朝京京帝以賀正表有戱侮字怒徵撰表人鄭道傳稱疾近請曰撰表之事臣與鄭摠亦預知摠今赴京臣亦願往上密賜黃金贐行近至禮部扣頭對曰臣等生於海外學未通
震乘總v1兵間熟究利病故也請依此制凡內外動兵之事敬奉敎旨以符發之無符而定郡縣地界召兵者以擅發論從之○遣都宣慰使鄭道傳畫定郡縣地界許以便宜以手書賜衣酒曰外面書三峰行次開坼相別日久思想殊甚欲遣申中樞往問行役崔兢適來備知
震乘總v1鄭道傳南誾冊永安君爲世子
震乘總v1辛卯十一年追癈鄭道傳黃居正孫興宗爲庶人禁錮子孫初中祖朝追廢鄭道傳等爲庶人太僕卿祝孟獻之還也李穡子孫以河崙權近所撰行
震乘總v1官一人豈能盡記國家事哉集賢殿常在禁中亦足記事命申穡魚變甲鄭麟趾等皆兼史職命柳寬尹淮改修高麗史初鄭道傳等因李穡李仁復所撰金鏡錄修麗史而以元王以下事多僭擬改稱宗者書王稱節曰者書生日朕書予詔書敎至是上曰若
羹墻錄v1詵三國末術僧圖讖上書請遷都於三角山南木覓北平肅宗從之創立南京營宮室以時巡住至我朝定鼎龍飛御天歌命鄭道傳撰新宮諸殿門名道傳竝書取名之義以進新宮曰景福取周雅君子萬年介爾景福之義燕寢曰康寧殿取洪範九五福康寧
見睫錄v1洪武甲戌冬命鄭道傳始築都城周九千九百七十五步高四十尺二寸乙亥九月上御景福宮國朝寶鑑
見睫錄v1太祖四年命鄭道傳名新宮諸殿道傳撰名巽書所撰之意以進名新宮曰景福臣按宮闕人君所以聽政之地四方之所瞻視臣民之所感造故壯
見睫錄v1初高麗政亂民散太祖勳德旣隆人皆歸心太宗與同知密直司事南誾吏曹判書趙仁沃判三司事趙浚忠義君鄭道傳大司成趙璞等五十二人協謀推戴侍中裵克廉等率國人奉國璽諸潛邸塡咽街巷排門直入羅拜呼千歲上不獲已卽位于壽
記聞v1位爲上王十年戊子昇遐壽七十四○○錄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益安大君芳毅等三十九人○相裵克廉趙浚金士衡鄭道傳沈德符柳曼殊○配享領相平壤君文忠公趙浚義安大君和左相宜寧君忠景公南在興安君景武公李濟靑海君襄烈公李之
記聞v1太祖四年命鄭道傳名新宮諸殿撰名幷書所撰之意以進新宮曰景福宮寢殿曰康寧殿東小寢曰延生殿西小寢曰慶成殿燕寢之南殿曰思政殿
記聞v1太祖嘗於庚申夜召鄭道傳及諸勳臣置酒酣太祖謂道傳曰寡人得至於此卿之力也道傳對曰鮑叔曰願公無忘在莒時願仲父無忘在檻車時臣
大東遺事v1佐之才出爲世用最爲太祖所知累辟幕下回軍之後同升爲相時太祖功業日盛夢周密嗾臺陳欲先翦其羽翼趙俊南誾鄭道傳等而因及太祖太宗知之以告太祖曰死生有命但當順受而已一日太宗作歌侑酒以諷之夢周亦作歌和之以見志太宗知
大東彙纂v1鄭道傳之亂元敬王后使奴金小斤托以腹痛猝劇請來太宗于勤政門外與之密語定計太宗拂衣還入禁中后欲自至太宗所在
東藩大義v1景仰於上國當使价往來之際有賓主交接之儀在禮則然於誘何敢其有女眞隷于東寧旣皆作軍而當差安肯遣人而說誘鄭道傳之辭也帝以表辭倨益怒命遼東毋納朝鮮使已而帝遣使諭送親男時我太宗大王爲靖安君上命太宗與趙胖南在
東藩大義v1二十八年乙亥十二月朝鮮遣使貢方物帝以表辭不遜留其使柳玽徵撰表人鄭道傳未幾釋玽還昭代典則○朝鮮入貢賀正朝表有犯上字上怒下使者吏鄭集一作總所撰詔還所貢索撰表者大政記大事
東藩大義v1攻遼之隙而我太上王擧義回軍翊戴中國忠誠克著帝心嘉賞故置而不問及我太上傳付上王之時太上疾漸亦有鄭道傳敢拒帝命又欲攻遼貪立幼孼謀戕寵適禍變之急故急中國亦値高帝登遐庶事未遑故不問爾上王傳付殿下之時適中國方
小華龜鑑v1在爲大憲請鞫上咲曰帝王之興不係世類明皇帝亦以匹夫得天下世類之說何足介意況偶與人語何必鞫問○稗官雜記曰鄭道傳奉使咸鏡太祖寄書外面曰三峯行次開坼中曰相別日久思想殊深欲遣辛中樞往問行役崔兢適來備知動止稍自慰解茲將
小華龜鑑v1乙亥命鄭道傳撰進經國大典河崙更詳定名經濟六典
小華龜鑑v1審則莎土盡剝曲墻皆頹而象設齋所基址完然大臣許積鄭太和等議營建丁字閣安香廳典禮廳宋時烈又箚開國之初奸臣鄭道傳等密行邪謀以致太祖弊屣天位昭悼二公夭閼惟我太宗堯傳舜授有辭後世唯神德陵寢之儀有損配侑之禮有闕此不過當
小華龜鑑v1回自京師鄭摠等被刑先是鄭摠等如京請誥命帝怒於進表有回避字拘留摠等又賀正表有戲侮字拘留使臣柳珣徵撰表人鄭道傳道傳托疾權近自請行帝見近怒稍解及近摠將辭近服賜衣摠以新聞康妃喪服素衣帝怒獨遣近還鞫摠等摠等懼而逃被執
小華龜鑑v1殿議建儲克廉等曰平時立嫡世亂先有功神德潛聽之哭聲出外浚等退議曰康后必欲立己出芳蕃狂悖遂請封芳碩爲世子鄭道傳南誾李稷等附芳碩忌諸王子謀去之密啓依皇朝封王例分遣諸王子於各道上不答因諭太宗曰外間之議汝輩不可不知宜
小華龜鑑v1相星山伯諡貞節金士衡字平甫麗朝科癸酉拜相上洛伯諡翼元趙浚字明仲號松堂麗朝三司左使癸酉拜相平壤伯諡文忠鄭道傳字宗之號三峯麗朝判三司使甲戌拜相奉化伯附芳碩誅死
小華龜鑑v1知不可不變吏判朴信曰陰陽家葬書異論蜂起請悉除之上曰漢光武之明猶惑圖讖是不明乎道也我朝讖書木子走肖之說鄭道傳以爲此必好事者所作然竟從是書遂上寶籙之典遷都之日河崙深信此書欲定都毋岳予獨不信乃定漢都亟令書雲觀陰陽
小華龜鑑v1辛卯命追正鄭道傳黃居正孫興宗罪廢爲庶人禁錮子孫朝野僉載曰初中朝太僕卿祝孟獻之還也李穡子孫以河崙權近所撰行狀囑孟獻求銘
小華龜鑑v1之文章禹敬錫柳時蕃之才諝俱未展布可勝惜哉又曰納米許通事初因尼胡之變以助軍興今宜除納米之法云云○野史云鄭道傳母乃私婢道傳爲大提學金江湖以前妻卑微改娶他妻坐此枳淸堇得司乂而畢齋以後妻之末子選玉堂若今日則貳妻之子
小華龜鑑v1智伯君子以節許之洪亦無讓於豫讓矣○命尹淮權蹈薛循等註資治通鑑賜名資政殿訓義○命左相柳觀提學卞季良校讎鄭道傳所撰麗史正其訛誤
野乘v1○李仁任與百官連名爲書将呈北元林撲朴尚衷鄭道傳以先王決策事南今不當事北不署名
野乘v1○北元使至李仁任池奫䓁欲迎之金九容李崇仁鄭道傳䓁上書都堂曰若迎元使一國臣民皆䧟乱賊之罪仁任令道傳迎之道傳詣慶復臭苐曰我當斬使而来仁任怒乃遠
野乘v1○以我太祖及李穡爲門下侍中鄭夢周權近鄭道傳充書筵官
野乘v1㝎昌君瑤是爲恭讓王初帝冊異姓爲王我太祖與沈德符䓁㝎策立瑤爲王池涌奇鄭夢周偰長壽成石璘趙浚朴葳鄭道傳稱九㓛臣
野乘v1○恭讓二年辛未省五軍為三軍都制府以太祖爲都揔使裵克廉爲中軍趙沷鄭道傳爲左右軍并都揔制使○鄭道傳上書都堂請誅李穡禹玄寳李種學䓁䑓諌亦交章請治乃并流遠地
野乘v1召還鄭道傳趙沷南誾䓁
野乘v1甲戌命鄭道傳南誾李稷干漢陽
野乘v1上國繋公䓁淸州獄峻法鍜錬成獄云者又指誰與言歟請訊崙治罪近斬棺籍家以懲後崙上書自明云用事者指南誾鄭道傳也云云上命有司覈實以聞果興宗居五誾䓁事也上謂羣臣曰興宗䓁希權臣意枉殺崇仁言用事非指太祖明矣政
紫橋小藏v1重大議大臣事傳曰議大臣稟處又啓議大臣則領相金昌集左相李健命以爲歷代以弟建儲輒封太弟而我朝太宗討平鄭道傳之後封爲世子太宗推位於定宗而太宗世子之號仍舊不改先正臣李彦迪當仁宗違豫之日明宗方爲大君而
靑野謾集v1使遺所善判書郭忠輔令擧事忠輔佯諾奔告太祖囚佇巡軍獄鞫之太祖與沈符池湧奇鄭夢周偰長壽成石磷趙後朴葳鄭道傳等議禑昌本非王氏不可奉宗祀當廢假立眞奉定妃敎遷禑于江後放昌于江華翌日太祖與諸功臣定策迎立
靑野謾集v1下敎曰除已見伏招外宜於各處安置後有稟狀現露予不敢私國人大悅柳爰廷還自京師啓曰帝知彝初誣妄遠流于漂水縣鄭道傳等还自京師宣諭聖旨尹彝李初謀亂汝國事朕旣不信已曾斷罪汝國復何虞疑臺諫交章請竄禹玄寶疏三上皆留中遣
靑野謾集v1鄭道傳嘗從太祖見率伍整齊進而密言曰義哉此軍何事不可濟太祖曰何謂也道傳謬言曰謂摯倭于東南耳營前有老松道
靑野謾集v1太祖至是聞墜馬有喜色遣人嗾坮諫曰李某今墜馬病篤宜先剪羽翼趙浚等可圖也乃刻三司佐使趙浚政堂文學鄭道傳密直副使南誾禮曹判書尹紹宗判典校寺南在淸州牧使趙璞王下其書都堂夢周從中扇之將後等六人竝流遠地分遣其
靑野謾集v1衆心爭相推戴或有於稠人廣坐中揚言曰天命人心已有所屬何不亟爲勸進至壬申六月太祖與閔定計密與仁沃趙俊鄭道傳趙璞等五十二人協謀推戴然畏太祖震怒不敢以告太宗入白神德王后以達于太祖王后亦不敢告太宗出謂誾等曰宜卽
靑野謾集v1而說誘但遼東都司起取朊歡不花之時其管下人民或有不卽隨行者由彼安土非臣勒留無所供於我邦各自隨其舊業卽鄭道傳之辭也天子以來辭倨傲益怒命遼東母納朝鮮之使使臣至遼東不得入而返者凡五輩天子遣使誘太祖送親男太宗謂太宗
靑野謾集v1是無學也與之歸而狀聞太祖大喜事以師禮仍問定都之地無學乃至漢陽曰以仁王山作鎭而白岳南山爲左右龍虎鄭道傳難之曰自古帝王之南向而冶未間東向也無學曰不從吾言垂二百年當思吾言新羅義相大師山水秘記云擇都漢陽者
靑野謾集v1甲戌命鄭道傳南誾李稷等相宅于漢陽以前朝肅宗時所營宮闕舊址狹隘更相其南以亥山爲主壬坐丙向是年十二月始級翌年秋九月
靑野謾集v1之黨爲小人太祖邊則以太祖爲領袖以圃隱之黨爲小人矣及太祖之黨所盛圃隱於太祖莫如之何思欲除去其羽翼鄭道傳輩而亦不能得矣及辛褐死朝臣議所立於牧隱牧隱曰當立前王之子於是立禑子昌蓋圃牧則以禑昌非辛氏
靑野謾集v1鄭道傳與禹玄寶有宿忩及太祖卽位請穡玄寶等極刑太祖不聽後召穡待以古舊之禮置酒歡飮洽賜科田隨品烋田謂之科田
靑野謾集v1家而先赴闕太祖以賓禮待之使殿張八道分畫屛風以手指點曰某郡某州有某樓其亭欲得當代文章鉅公作記須布已令鄭道傳撰之頗不愝意思得公作以此渴望公之來覲今始來熹不自勝第爲予揮拪以侈一國諸名勝之地近辭退而製記以進上卽加
靑野謾集v1鄭道傳與李陶隱崇仁同師牧隱才名相將而定向異道傳積不平及我朝受命道傳爲柄臣令其私人黃居正出宰陶隱
靑野謾集v1克廉等議無復以嫡以功爲言者克廉俊等退而議曰康氏必欲立已子芳蕃狂悖其李稍可遂請芳碩爲世子鄭道傳南誾等附芳碩忌諸王子謀欲去之密啓請依中朝諸王子封主之例分遣諸王子於各道太祖不答卜者安禎曰世子異母
歷代帝王紀年v01姜克誠醉竹尹子雲鄭道傳三峯
國朝捷錄v01鄭道傳
國朝捷錄v01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日芳毅等三十九人佐我太祖大王開國太祖碑陰記▣芳毅不參且有鄭道傳戶判趙璞伊成君孫興宗忱李生判樞李懃知樞趙琦長成君鄭龍壽吳蒙乙等
國朝捷錄v01人謂金門羽客崔瀣彦明拙翁孤雲之後不遇於世退去修道自作槐山隱土傳李資賢以戚里避權棄官入山修道累招終不起鄭道傳定之三峯博於技藝又解地理此下本朝人金時習東峯洪裕孫世祖時人丁壽崑成廟時人能文章名士化仙云鄭希良淳夫虛
郯述v03功臣中鄭道傳趙璞孫興宗沈孝生李懃鄭龍壽張堪吳家乙黃居正張至和張思靖任彦忠等十二人太宗朝釐改不錄
職官考v01戊寅洪武三十一年八月太祖冊定宗爲世子九月還松都禪位鄭道傳南誾柳曼殊朴咸等立僞世子謀亂義安大君和等除奸定社
靑邱風雲v1辛禑時李仁任池大淵主事元公及鄭道傳主事明
靑邱風雲v1妻父李崇金士衡字平甫安東人翼元公開國定社功臣平生未嘗一被彈劾癸酉拜父藏祖永煦曾恂外郭元振妻父朴珽鄭道傳字宗之號三峯奉化人前朝及第判三軍本朝開國功臣甲戌拜戊寅以罪免父云敬祖均曾永粲
靑邱風雲v1鄭道傳南誾柳蔓殊等功也
韓史綮v1壬申朝鮮太祖高皇帝康獻王元年本年七月以上繫高麗明太祖洪武二十五年秋七月乙未高麗臣裵克廉趙浚鄭道傳等與大小臣僚奉高麗傳國璽詣太祖邸呼千歲請進明日卽七月十六日太祖卽位于壽昌宮夜召浚入臥內日卿知漢
韓史綮v1開遼東路○高麗之俗僧徒有私田法孫相傳訟爭紛然王自微時惡之至是下敎飭僧人毋得有私田○先是王欲都漢陽命鄭道傳李稷等領僧無學往漢陽相地得於白岳之南營宮闕冬十一月成王乃移都之無學者善於風水王微時多議墓地及貴封
韓史綮v1其事浚等度不可爭相與言曰芳蕃狂悖不可爲生民主芳碩或者其可乎遂以芳碩對王遂封芳碩爲世子密令鄭道傳南誾等輔護之道傳等恐太宗不利於世子言于王曰諸王子宜依古皇子封王例封之各道王不能決道傳遂欲盡除諸
韓史綮v1庚辰二年明惠帝建文二年以河崙爲右玫丞兼判兵曹事○太宗之平鄭道傳亂也知中樞府事朴苞與焉及錄定社勳苞自以功高賞微內懷不平誘懷安大君芳幹使圖太宗曰靖安君兵强衆附公
韓史綮v1論曰賤待庶孼自高麗末臺官劾鄭道傳始此不過一時排擊之術也乃太宗聽一怪鬼之言視爲典常遂以至於錭一世之庶子不亦過乎先王之法嫡妻無子則以妾
東國續修文獻錄v1裵克廉字量可星州人領相諡貞節趙浚字明仲號松堂平壤人領相文忠金士衡字平甫安東人上洛伯領相翼元鄭道傳字宗之號三峯奉化人文左相罪死後伸
東國續修文獻錄v1定宗朝推忠協贊靖難定社功臣洪武戊寅禪位于定宗和等十七人除群奸鄭道傳南誾柳曼殊朴咸定社
國朝人物志v1人高麗恭愍朝文科累官至門下左侍中以廉謹稱恭讓王壬申六月十六日克廉與趙浚鄭道傳等大小臣僚及閑良耆舊奉傳國寶詣太祖邸合辭勸進入本朝仍拜左侍中策純忠奮義佐命開國功
國朝人物志v1同正高麗末累官至副元帥佐太祖倡義旋師與鄭夢周池湧奇□長壽成石璘朴葳趙浚鄭道傳等決策率宗親耆老文武臣僚啓奉定妃之命廢禑昌父予冊立恭讓王時稱九功臣入本朝錄功第一甲戌
國朝人物志v1人以蔭補官高麗末爲節制使禦倭有功王賜弓矢壬申佐太祖錄開國勳戊寅爲領議政與鄭道傳同死子原之密直原之子浛縣監浛子自湄文宗辛未文科監察
國朝人物志v1薦到郡募兵大破之禑攻遼誾從我太祖幕下獻回軍策錄功陞密直副使恭讓朝臺諫交章請誅鄭道傳下獄誾力不能救稱疾自免壬申四月諫官金震陽等論趙浚鄭道傳南誾尹紹宗南在趙璞
國朝人物志v1星州人尙太祖第三女慶順公主贊我太祖開國錄元勳封興安君戊寅鄭道傳之死也公主謂濟曰吾夫妻若歸靖安君第則得生矣公主與芳蕃芳碩俱出神德后康氏故濟
國朝人物志v1及回軍和尙與鎭安大君芳雨等逃至太祖大喜曰得天助也之蘭娶神德后之姪女當戊寅鄭道傳之難善處其間以偏將助明征建州虜以功受封靑海伯陪太祖幸永興還于豐壤上疏請爲
國朝人物志v1號二櫟亭太祖異母弟高麗侍中鄭夢周嗾省憲交章請誅趙浚鄭道傳等太祖曰如此誣枉不可不辨將造朝而病不能起遣和及李濟等啓曰省憲論浚請與臺諫卞明
國朝人物志v1太祖第七男神德后康氏出也壬申封撫安君戊寅及於鄭道傳之難肅宗庚申追封大君大君與弟芳碩同時及禍太祖悼念二殤屢幸僧舍供佛以資冥福
國朝人物志v1太祖第八男開國初冊封世子戊寅鄭道傳之難與同母兄芳蕃同被禍時年十七太宗追擧恤典諡故世子曰昭悼封宜安君世宗朝以
國朝人物志v1行在命撰定陵碑文近撰進拜藝文館學士近撰進鷄龍山頌明太祖以本國表箋語涉戲侮徵撰表人鄭道傳托病不行我太祖難之近奏曰此表臣與鄭摠潤色之臣當往辨上曰卿不須往近曰臣往罪或可恕
國朝人物志v1陽村之門高麗禑朝乙丑登第入本朝太宗丁亥魁重試官至判右軍都摠制府事太祖朝鄭道傳鄭摠等修高麗史因李穡李仁復所撰金鏡錄撰之道傳以元王以下事多僭擬稱宗者書王稱節日
國朝人物志v1淸州人文簡公樞子高麗禑朝文科壯元累官至政堂文學入本朝錄開國功臣一等勳封西原君與鄭道傳撰高麗史太祖丙子以撰表不恭徵入于明被拘流大理衛道卒諡文愍昭代紀年東國文獻合錄
國朝人物志v1高靈人高麗文科恭讓王末年爲鄭道傳南誾所斥流遠地入本朝累官至門下評理判開城府事大東韻玉
國朝人物志v1驪興人府院君文度公霽弟麗季文科壬申七月十三日趙浚鄭道傳等詣太祖第勸進開獨不悅形於色欹首不言南誾欲格殺之太宗曰義不可殺力止之入本朝以
國朝人物志v1陽醫術星經地理皆極其精有經濟材好相人見太宗傾心附之每謂人曰斯人蓋天英氣戊寅佐太宗誅鄭道傳南誾柳曼殊等拜推忠協贊靖難開國定社功臣晉山府院君錄一等勳定宗庚辰陞贊成尋
國朝人物志v1埛娶判書英陽南暉珠女生叔蕃中生員太祖癸酉文科政堂文學淸州鄭摠以其女妻之鄭道傳忌河崙出爲忠淸道觀察使時太宗往餞于其家就前行酒崙佯醉傾覆饌盤洒被御衣太宗怒
國朝人物志v1歲王手書諫臣存吾之子安國授直長後登文科恭讓朝爲諫官與金震陽等請誅趙浚鄭道傳等及鄭夢周伏節以其黨流于遠地入本朝佐太宗平朴苞難賜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號封鷄城
國朝人物志v1全州人太祖兄完豐君元桂子佐太祖開國壬申錄勳戊寅定鄭道傳亂錄定社功封完山府院君定宗庚辰平芳幹難加奮義翊戴佐命之號錄二等勳拜兵曹判書
國朝人物志v1字義民自號添丁子永川人高麗禑朝文科恭讓王壬申爲獻納與金震陽等劾鄭道傳以鄭夢周黨流于遠地入本朝累官至密陽府使爲親居廬以孝聞旌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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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3-07증빙자료 부족으로 출생지라고 알려진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 기록 삭제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