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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偰長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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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천민(天民)
호(號)운재(芸齋)
시호(諡號)문량(文良)
생년1341(충혜왕 후2)
졸년1399(정종 1)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설손(偰遜)
출신지위그르(Uighur, 回鶻)
저서『직해소학(直解小學)』
저서『운재집』
공신호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
공신호정난공신(定難功臣)

[상세내용]

설장수(偰長壽)
1341년(충혜왕 복위 2)∼1399년(정종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천민(天民), 호는 운재(芸齋). 부원후(富原侯)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본래 위그르(Uighur, 回鶻)사람으로 1358년(공민왕 7) 아버지 설손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로 올 때 따라와 귀화하였다.

1360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있던 중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서역인(西域人)이므로 왕이 특별히 명하여 상복을 벗고 과거에 나아가게 하였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오르고, 왜구를 퇴치할 계책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다녀오고, 1388년(창왕 즉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에 다녀왔다. 공양왕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 공이 있었으므로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이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의 특명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 지금의 慶州)을 본관으로 하사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98년 정종이 즉위하자 계품사(啓稟使)로 명에 가던 도중 명태조가 죽었으므로 진향사(進香使)로 사명이 바뀌어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전후 8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였다.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저서로는 『직해소학(直解小學)』『운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집필자]

박옥걸(朴玉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