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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金士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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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평보(平甫)
호(號)낙포(洛圃)
시호(諡號)익원(翼元)
생년1341(충혜왕 후2)
졸년1407(태종 7)
시대조선전기
본관안동(安東[舊])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천(金蕆)
조부김영후(金永煦)
고조부김방경(金方慶)
공신호보리공신(輔理功臣)
공신호개국공신
공신호정사공신(定社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사형(金士衡)
1341년(충혜왕 복위 2)∼1407년(태종 7). 고려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舊]).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김방경(金方慶), 할아버지는 김영후(金永煦), 부친은 부지밀직사사 김천(金蕆)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집필자]

한영우(韓永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