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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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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332(충숙왕 후1)
졸년1404(태종 4)
시대조선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저서『석간집(石磵集)』

[상세내용]

조운흘(趙云仡)
1332년(충숙왕 복위 1)∼1404년(태종 4).(주1)
생몰년
『태종실록』 1404년 4년 12월 5일자 조운흘 졸기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이 졸(卒)하였다. ...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옛 원성(垣城)에서 종명(終命)하니, 후손이 없다." 참고.
고려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평장사 조맹(趙孟)의 31대손이다.(주2)
조맹과의 관계
『고려사』에 실린 스스로 지은 조운흘 묘지명에 "조맹의 31대손"이라 되어 있고, 『태종실록』 1404년 4년 12월 5일자 조운흘 졸기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은 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니, 고려왕 태조(太祖)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다."라고 되어 있다. 조맹이 고려 태조대에 활동한 사람이라면 이 30-31대라는 기록은 이상하다. 확인이 필요하다.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며,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고, 합문사인(閤門舍人)을 거쳐서 1361년에 형부원외랑에 올랐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피난하던 왕을 호종하여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이 되었고 이어서 전라서해(西海)양광(楊廣)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고 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 「기우도찬(騎牛圖贊)」‧「석간가(石磵歌)」 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등용되어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판교원(板橋院)‧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할 때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일컬으면서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역부들과 함께 일하였다.

1388년 다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기용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서 서해도관찰사로 내려가서 왜구를 토벌하여 치적을 올렸다.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오르고, 1390년(공양왕 2)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그러다가 1392년 조선개국 후에 강릉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칭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이 되었다. 그 뒤로 관직에서 떠나 여생을 보내다가 스스로 묘지를 짓고 73세에 죽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석간집(石磵集)』이 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편서로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전하는데, 이는 최해(崔瀣)『동인지문(東人之文)』 중에서 「오칠(五七)」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최해의 비점(批點)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밖에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5수의 칠언절구가 『동문선』에 보인다. 「제구월산소암(題九月山小庵)」‧「송춘일별인(送春日別人)」등의 시편을 살펴보면, 현실참여와 은둔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를 자연을 매개로 해결하고자 하는 흔적이 나타난다. 현실 비판의식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의 생애가 말해주듯, 고려말 전환기에 선 지식인의 형상이 잘 그려져 있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저작이 거의 인멸되었기 때문에 고려조선초의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그의 존재가 선명히 부각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宗實錄
東文選
文獻備考
三韓詩龜鑑
拙藁千百
한국문학통사 2(조동일, 지식산업사, 1983)

[집필자]

박노춘(朴魯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