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무방(李茂芳)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B34BC29B1319X0
자(字)석지(釋之)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319(충숙왕 6)
졸년1398(태조 7)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양(光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인영(李仁英)
공신호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공신호여절공신(礪節功臣)
공신호추충려절찬화공신(推忠礪節贊化功臣)

[상세내용]

이무방(李茂芳)
1319년(충숙왕 6)∼1398년(태조 7).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석지(釋之). 찬성사에 증직된 이인영(李仁英)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급제하여 전교교감(典校校勘)에 오르고, 공민왕 초년에 외직으로 나가 순창군(淳昌郡)을 다스렸는데, 고관 중에 사사로이 토산물을 청구하는 자가 있었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뒤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당대의 권신 김용(金鏞)에게 접근하지 않아 미움을 받았다. 당시의 제도에 봉릉(封陵)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집의를 시켜 서명하게 하였는데, 서명한 사람은 크게 출세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모두 이를 회피하였다.

그러나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정릉(正陵: 魯國公主의 능)을 봉하게 되었는데, 이때 집의 홍원철(洪原哲)이 서명을 꺼려하므로 이를 대신하여 서명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복(起復)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를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뒤 민부상서(民部尙書)대사헌을 거쳐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고, 이어 밀직학사(密直學士)로 승진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계림부윤이 되었는데, 마침 풍년이 들자 백성들에게 어염(魚鹽)을 팔아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진대(賑貸)를 준비하였다. 그 공적이 순찰사 최영(崔瑩)에게 인정되어 판개성부사로 승진하였고, 여절공신(礪節功臣)이라는 호가 더하여졌다.

1374년 정당문학으로 지공거(知貢擧)를 맡기도 하였으며, 우왕초에는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가 1376년(우왕 2) 시중 경복흥(慶復興)과의 알력으로 파직되어 광양군(光陽君)에 봉하여졌다.

1379년 문하평리(門下評理)명나라에 가서 공물을 바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작명(爵命)을 청하였으나 명나라의 거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올랐고, 공양왕 때는 추충려절찬화공신(推忠礪節贊化功臣)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문인(門人) 조준(趙浚)의 천거로 검교문하시중이 되고 광양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