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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방(洪霶)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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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망(景望)
호(號)지계공(芝溪公)
생년1573(선조 6)
졸년1638(인조 16)
시대조선시대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이상(洪履祥)
조부홍수(洪脩)
증조부홍우전(洪禹甸)
외조부김고언(金顧言)
저서『지계예설(芝溪禮說)』
저서『제선의식(祭先儀式)』
저서『지계문집(芝溪文集)』

[상세내용]

홍방(洪霶)
1573년(선조 6)∼1638년(인조 1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망(景望), 호는 지계공(芝溪公).

홍우전(洪禹甸)의 증손으로, 조부는 홍수(洪脩)이고,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장자(長子)이다. 모친은 김고언(金顧言)의 딸이다. 문음(門蔭)으로 출사했으며 1599년(선조 32) 은산현감을 제수받고 재직 중 평안감사 신율(申慄)의 서계(書啓)에서 “몸가짐이 청근하고 처사가 상명하다.”는 평을 들었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정언(正言)공조좌랑(工曹佐郞), 1607년(선조 40)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며, 1610년(광해군 2) 동료들의 인혐에 대한 처치를 지체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체차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예조참의(禮曹參議), 외직으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으며, 1635년(인조 13)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예조판서(行禮曹判書)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도승지부제학에 이르렀다. 1619년(광해군 11)에 동지사로, 1628년(인조 6)에는 희종황제의 죽음에 대한 진향사 겸 진하사로 두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1621년(광해군 13) 정시의 시관으로 참여할 때, 박승종(朴承宗)이이첨(李爾瞻)의 알력 다툼으로 이이첨의 당(黨) 한 사람만이 급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과거의 부정을 주장하며 이정귀(李廷龜), 김신국(金藎國) 등과 함께 치죄를 요구 당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 개성유수를 지낼 때, 경기도강원도에서만 시행하던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방납의 폐를 없애고자 하였다. 아들 이주일(李柱一)부수찬(副修撰)이 되어, 부자(父子)가 동시에 홍문관의 관직을 차지하는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세자시강원문학, 지제교로서 『선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화담집(花譚集)』을 간행했다. 저서로는 『지계예설(芝溪禮說)』『제선의식(祭先儀式)』『지계문집(芝溪文集)』 등이 있다.

[참고문헌]

洪履祥神道碑
光海君日記
宣祖實錄
仁祖實錄
承政院日記
燃藜室記述

[집필자]

전종헌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