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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柳曼殊)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0B9CCC218D1398X0
자(字)득휴(得休)
생년?(미상)
졸년1398(태조 7)
시대고려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총(柳總)
공신호회군공신(回軍功臣)
공신호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공신호회군공신

[관련정보]

[상세내용]

유만수(柳曼殊)
미상∼1398년(태조 7).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득휴(得休).

부친은 우부대언(右副代言) 유총(柳總)이다.

유만수(柳曼殊)고려 공민왕 때에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었고, 장군 등 무관직을 두루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다. 1379년(고려 우왕 5)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고, 이어 경상도원수를 겸한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를 뒤따르며 위화도(威化島)에서 함께 회군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임명되었고 회군공신(回軍功臣)이라고 불리워졌다. 1389년(창왕 1)에는 절제사의 신분으로 이방과(李芳果: 정종)와 함께 해주(海州)에 쳐들어 온 왜구를 물리쳤다. 이어 경오년과 신미년에 각각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를 겸한 응양군상호군(應揚軍上護軍)이 되었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의 지위에 이르러 고려의 멸망을 맞았다. 1392년(조선 태조 1) 조선이 세워지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회군공신 1등에 추가 기록되면서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의 지위에 이르렀지만, 제l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아들은 세 명이며, 유원지(柳源之)유은지(柳隱之)유연지(柳衍之)가 그들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

[집필자]

전혜연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21조선왕조실록의 유만수 졸기를 참고하여 아버지를 유총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