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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을지(河乙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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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318(충숙왕 5)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본관진양(晉陽)
활동분야관료 > 관인

[상세내용]

하을지(河乙沚)
1318년(충숙왕 5)~미상. 고려의 관인. 본관은 진양(晉陽).

1344년(충혜왕 복위 5) 지공거(知貢擧) 박충좌(朴忠佐)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郞)으로 앞서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73년 강화만호가 되었을 때 왜구가 양천(陽川)을 노략질하고, 한양부(漢陽府)에 이르러 가옥을 불태웠는데도 방비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으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1376년(우왕 2)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으나, 재주도 없고 행실도 바르지 못한데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주어 원수직을 얻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또, 이때 군적(軍籍)을 편성하면서 연호군(煙戶軍)과 별군(別軍)을 정원 외로 편성한 죄로 파직되었는데, 후임 원수인 유영(柳濚)이 부임하기도 전에 전사(田舍)로 돌아 갔다.

이 틈을 이용하여 왜구 20여척이 나주에 들어와 병선과 병영 및 민호를 태우고 노략질을 하였으나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체포되어 장형 100에 처해지고 하동현에 유배되었다.

곧 석방되어 계림원수(鷄林元帥)로 기용되었는데, 일본해도포착관(日本海道捕捉官) 박거사(朴居士)계림에 침입한 왜구에게 고전하는 것을 방관하여 대패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진성규(秦星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