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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崔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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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최석(崔碩)
생졸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1277년(충렬왕 3) 탐라(耽羅)에 크게 기근이 들었을 때 위무차 순시하였다. 이후 벼슬이 누진하여 승평부사(昇平府使)가 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1281년에 비서랑(祕書郞)이 되었다. 승평부의 풍속에 읍의 수령이 갈릴 때마다 반드시 말을 주었는데, 부사(府使)는 8필, 부사(副使)는 7필, 법조(法曹)는 6필씩 마음대로 골라가게 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관례에 따라 말을 고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말을 고르지 않았을 뿐더러 고을 사람들이 억지로 딸려 보낸 말을 서울에 도착해서는 다시 돌려보내니, 그뒤로는 그러한 폐단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때 7필의 말을 보냈는데 오던 도중 새끼를 낳아 8필이 되었다. 모두 돌려보내어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 팔마비(八馬碑)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현재 순천시 죽도봉공원에 그를 기리는 팔마탑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집필자]

김기덕(金基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