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보(石天補)
[상세내용]
석천보(石天補)
생졸년 미상. 고려 후기의 환관. 본관은 충주(忠州).
밀직 석주(石胄)의 아들이다.
내료(內僚)로서 아우인 석천경(石天卿)과 더불어 성색(聲色)으로써 충렬왕의 총애를 받기에 힘썼다.
관현방(管絃坊)의 대악(大樂)과 재인이 부족하다 하여 행신(倖臣)들을 각 도로 보내어 관기로서 인물과 재예가 있는 자를 뽑고, 또 도성 안의 관비나 무당으로 노래와 춤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궁중에 입적시켜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모자를 씌워 남장을 시켜 이들과 가무를 일삼으니 군신의 예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또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였다.
더욱이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를 이간하여 나라의 근심이 되기도 하였다.
1303년(충렬왕 29) 충렬왕을 호위하여 섬으로 피하였으나, 원나라를 배척하려 한다는 김세(金世)의 고소로 인하여 원나라로부터 파견된 단사관(斷事官)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에게 잡혀가서 김세와 대질한 뒤 이듬해 아버지와 아우 석천경과 함께 안서(安西)로 장류되었다.
밀직 석주(石胄)의 아들이다.
내료(內僚)로서 아우인 석천경(石天卿)과 더불어 성색(聲色)으로써 충렬왕의 총애를 받기에 힘썼다.
관현방(管絃坊)의 대악(大樂)과 재인이 부족하다 하여 행신(倖臣)들을 각 도로 보내어 관기로서 인물과 재예가 있는 자를 뽑고, 또 도성 안의 관비나 무당으로 노래와 춤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궁중에 입적시켜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모자를 씌워 남장을 시켜 이들과 가무를 일삼으니 군신의 예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또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였다.
더욱이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를 이간하여 나라의 근심이 되기도 하였다.
1303년(충렬왕 29) 충렬왕을 호위하여 섬으로 피하였으나, 원나라를 배척하려 한다는 김세(金世)의 고소로 인하여 원나라로부터 파견된 단사관(斷事官)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에게 잡혀가서 김세와 대질한 뒤 이듬해 아버지와 아우 석천경과 함께 안서(安西)로 장류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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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