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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손(裵仲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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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271(원종 12)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군인 > 장군

[상세내용]

배중손(裵仲孫)
미상∼1271년(원종 12). 고려 원종 때의 장군.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까닭에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배중손이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임연(林衍) 부자 계열에 속하는 무인으로 대몽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비타협적 항전의 계속을 주장한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몽고를 방문하고 개경에 돌아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서는 강화도를 철수하여 개경에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대하여 삼별초는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여 강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 등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였다.

또 도내에 있는 몽고인을 베어 단호한 대몽항전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 등의 지도로 이들은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고려사』의 기록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하여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역대 대몽항쟁책에 있어 최고 최후의 전략이며 배중손은 이를 단호하게 실천하였을 뿐이다.

진도에 본거를 설치한 삼별초는 도내에 방비의 성곽을 구축하고 웅장한 궁전을 설치하여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이 소식은 본토에도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의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하였다.

또 삼별초는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개경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또한 고려는 단독으로는 진도의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몽고와 연합하여 공략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欣都)로 바뀌었다. 흔도몽고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배중손의 이 제안은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성을 들어 몽고에 항복한 최탄(崔坦)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은 작전상의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1271) 5월 홍다구(洪茶丘)몽고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김방경흔도의 휘하에 있던 연합군과 합세하여 격전 끝에 간신히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새 정부 군왕인 승화후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이때 전사한 듯 그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별초의 여당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간이나 더 항전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元史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金庠基, 震檀學報 9‧10‧13號, 1938‧1939‧1941)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池內宏, 史學雜誌 38―9, 1926)

[집필자]

강진철(姜晉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