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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심(金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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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연수(淵叟)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262(원종 3)
졸년1338(충숙왕 후7)
시대고려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주정(金周鼎)
공신호협보공신(協輔功臣)

[상세내용]

김심(金深)
1262년(원종 3)~1338년(충숙왕 복위 7) 12월 23일. 고려의 문신. 자는 연수(淵叟)(주1)
"忠肅金公墓誌"에 자가 연수(淵叟)로 나옴. 이를 참고하여 자를 추가함.
. 본관은 광산(光山).

증조부는 김광세(金光世)이며, 조부는 김경량(金鏡亮)이고, 부친은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 김주정(金周鼎)이다. 첫째 부인 개성왕씨(開城王氏)는 4녀 1남을 두었고, 둘째 부인 진강노씨(鎭江魯氏)는 2남을, 셋째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1녀를 두었다(주2)
가계
"忠肅金公墓誌"를 참고하여 조, 증조, 부인들을 추가함.
.

1279년(충렬왕 5) 김흔(金忻) 등과 함께 뚤루게(禿魯花: 볼모)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낭장이 되었고, 1298년에 우부승지가 되었다.

1303년 충선왕원나라에 있을 때 오기(吳祁)석천보(石天輔) 등이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왕의 부자를 이간하므로 홍자번(洪子蕃) 등과 함께 삼군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여 오기를 잡아 원나라에 보냈다. 그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고, 이듬해 밀직부사(密直副使)오기 등을 처벌해준 데 대한 표(表)를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온 뒤 지밀직사사로 승진하고, 아버지의 직을 이어받아 만호(萬戶)가 되었다.

1305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충선왕과 함께 돌아와 도첨의참리판삼사사(都僉議參理判三司事)가 되었으며, 1307년 동녀(童女) 18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9년(충선왕 1)에 딸이 원나라 인종의 비가 되자 원나라의 세력으로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에 올랐으며, 이어 찬성사가 되었다.

1310년에 밀직사가 되고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는데, 다시 원나라에 들어간 충선왕이 귀국하지 않고 전지(傳旨)로 정치를 하면서 본국의 물자만 소비하는 것이 권한공(權漢功)최성지(崔誠之)박경량(朴景亮) 등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이 세 사람의 죄상을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탄원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이 일을 원나라의 태후에게 고하여 석방해주도록 탄원하고, 권한공 등도 뇌물을 써서 곧 풀려나게 되자, 도리어 이사온(李思溫) 등과 함께 임조(臨洮: 甘肅省)에 장류(杖流)되어 5년 만에 풀려났다.

1324년(충숙왕 11)에는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 판총부사(判摠部事) 여절보안공신(礪節保安功臣)이 되고, 다시 수성수의충량공신(輸誠守義忠亮功臣)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으로 개봉되고, 협보공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327년 충숙왕원나라에 있을 때 왕을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당시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 장백상(蔣伯祥)이 재물을 탐내고 권세를 남용하여 백성의 원망이 커지자 원나라에서 객성태사(客省太史) 도치(都赤)를 보내어 장백상을 가둔 뒤 홍수(洪綬)와 함께 성사(省事)를 대행하게 하였다.

1330년(충혜왕 즉위) 벼슬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손홍렬(孫弘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7-01김심 묘지명을 참고하여 생졸년 미상을 1262~1338년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