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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보(高龍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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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고용봉(高龍鳳)
이명(異名)고용복(高龍卜)
이명(異名)투만디르(透滿迭兒)
생년?(미상)
졸년1362(공민왕 11)
시대고려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관료 > 환관

[상세내용]

고용보(高龍普)
미상∼1362년(공민왕 11). 고려환관(宦官).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고용봉(高龍鳳)고용복(高龍卜). 원나라의 이름은 투만디르(透滿迭兒).

원나라에 들어가 내시(內侍)로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자정원사(資政院使)가 되었다. 내시 박첩목아불화(朴帖木兒不花) 등과 협의, 기자오(奇子敖)의 딸을 순제(順帝)의 제2황후로 승격시키고 측근으로서 권세를 잡고, 본국인 고려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충혜왕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기황후(妓皇后)의 어머니 이씨(李氏)를 맞으러 고려에 다녀갔으며, 이듬해 10월 순제의 명으로 충혜왕에게 술과 의복을 가지고 왔다가, 다음달 원나라의 사신과 함께 충혜왕을 잡아 원나라에 보내고 순제의 명으로 임시 국사를 정리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한 뒤 공신의 호를 받았으나 계속하여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부렸다. 결국, 어사대의 탄핵으로 금강산으로 추방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영록대부가 되었다.

뒤에 자정원에서 밀려나 고려로 돌아온 뒤로는 기철(奇轍)일파와 결탁하여 횡포를 부리다가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에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뒤 승려가 되어 해인사에 있던 중 1362년 2월 왕이 보낸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당시 원나라의 세력을 빙자하여 횡포를 부리던 무리들 중에서 으뜸이었으며, 사재를 들여 비구승 중향(中向)으로 하여금 전주보광사(普光寺)를 중창시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韓國系行譜

[집필자]

손홍렬(孫弘烈)
대표명고용보(高龍普)
용보(龍普)
봉호완산군(完山君)
성명고용보(高龍普)

성명 : "고용보(高龍普)"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4戒國內臣僚一革獘政慰恤百姓 王至自元翌日元使桑哥頒詔王宴桑哥用女樂百官侍座皆花名曰君臣度會宴○賜宦者高龍普㓛臣號○金海君李齊賢上書都堂非古制一切釐革之意也○判典校寺事李穀在元致書宰相陳社稷安危人民利病君子進
紀年便攷v4正七年元遣人取政丞盧頙二女以歸○以前政丞王煦爲左政丞因帝密㫖也○元遣使賜王煦金永暾衣酒及鈔○元放院使高龍普于金剛山龍普在帝側用事御史臺奏曰龍普高麗煤場人席寵怙勢作威作福親王丞相望風趍拜貨賂山積権傾天下恐漢之
紀年便攷v4海平縣洛東江濱江潰决民皆蕩析碩樹木為林藪得免江决之患縣民德之稱為尹政丞德藪性急數罵嬖人嬖人多㤪之甞托高龍普為高鹿都元帥臺官彈之官至政丞封化 平府院君忠穆戊子死葬以庶人之禮謚英毅子之彪見下曾孫可觀見下
紀年便攷v4元帥金得培李芳實䓁大破紅賊復京城餘黨奔渡鴨綠江而走○金鏞矯旨殺捴兵官中書平章事鄭世雲鏞素與世雲妬寵○高龍普㐲誅趙日新之亂龍普逃為僧在伽倻山王遣鄭之祥斬之忠惠之見執龍普為內應故有是刑○倭焚晉州○王自福州幸尙州
紀年便攷v4辛裔靈山人號草亭早登第又中元朝制科以高龍普姻族且以奸憸專恣用事於惠穆定三王之時人稱辛王官至政堂文學封鷲城君㳟愍乙未死
紀年便攷v4高龍普官者也以本國人入元有寵為資政院使故王拜三重大匡封完山君以寵之忠穆王時放于金剛山失勢於元還本國趙日新之
紀年便攷v4高龍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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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