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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로(洪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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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득지(得之)
호(號)경재(敬齋)
생년1366(고려 공민왕 15)
졸년1392(태조 1)
시대고려후기
본관부계(缶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민구(洪敏求)
조부홍련(洪漣)
묘소부계 동쪽 시현 간좌지원

[상세내용]

홍로(洪魯)
1366년(고려 공민왕 15)∼1392년(태조 1).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득지(得之), 호는 경재(敬齋).

조부는 홍련(洪漣)으로 감무(監務)를 지냈으며, 부친은 진사(進士)인 홍민구(洪敏求)이다. 처부는 흥양위씨 위신철(韋臣哲)이다. 아들은 홍재명(洪在明)이다.

홍로(洪魯)는 7세에 『효경(孝經)』을 능통하게 읽을 정도로 총명하고 부지런했다. 장성해서는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및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깊히 연구했다. 문장이 날로 늘어나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득지(得之)의 문장은 참으로 콩과 쌀같이 이로운 물건이다.”라고 칭찬했다. 과거(科擧)에는 뜻이 없었으나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인 1390년(공양왕 2)에 대과에 급제했다. 포은(圃隱)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조박(趙璞)오사충(吳司忠)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를 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들을 적극 변호하여 사태가 더 진행되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고향인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와 부모 봉양과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했다. 마을 이름은 원래 대식(大食) 혹은 대야(大夜)라 했으나, 경재(敬齋)대율(大栗)로 고치고 작은 서재를 지어 경재(敬齋)라 했다. 1392년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그의 무덤은 부계 동쪽 시현 간좌지원에 있다. 세인이 말하기를 “공의 학문의 연원은 포은에게서 얻었으며, 출처의 바름과 지절의 굳음, 소박한 학문 등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고 하였다. 군위군 부계면 남산면의 제2석굴암 위쪽 계곡 옆에 척서정(陟西亭)을 지어 후손들이 경제의 절의 정신을 추모하며 제향했다. 척서정 옆에 양산서원(陽山書院)을 세워 그의 절의와 학덕을 기리었으나 대원군(大院君) 때 철폐되고 현재는 양산서당으로 복원되었다. 가훈(家訓)을 비롯하여 시 몇 수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敬齋先生實記

[집필자]

전종헌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